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탄금대 전투
1592년 · 조선 · 막기
탄금대 전투 — 조령이냐 들판이냐
한눈에 보기
- 언제
- 1592년 · 조선 선조 25년
- 어디서
- 문경 조령과 충주
- 무슨 일
- 1592년 4월, 부산에 오른 일본군이 한양을 향해 북으로 올라왔다(임진왜란). 조선 장수 신립이 충주 탄금대 앞 들판에서 맞섰다.
- 무엇이 문제였나
- 험한 고갯길 조령을 버리고 들판에서 싸운 조선 주력군이 하루 만에 무너졌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뚫려 왕(선조)은 피란길에 올랐다.
- 이야기 속 목표
- 신립의 군대가 넓은 들판이 아니라 좁은 조령 고갯길에서 일본군을 막게 만든다
배경: 열흘 만에 무너진 남쪽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오른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은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왔다. 14일 부산진, 15일 동래성이 무너졌고, 17일 무렵 조정에 급한 소식이 닿았다. 조정은 순변사 이일과 삼도도순변사 신립을 내려보냈다.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을 막으며 이름을 떨친 장수였고, 도체찰사 류성룡이 그를 보냈다. 고니시의 뒤로는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과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이 다른 길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4월 25일, 상주의 패배
먼저 내려간 이일은 4월 25일 상주에서 일본군에 졌다. 그는 간신히 몸을 빼 충주로 달아나 신립의 군대에 합류했다. 신립이 이끈 군사는 약 8천으로 전하지만 자료마다 다르고, 대부분은 급히 모은 징집병이었다. 칼을 처음 잡아 보는 사람도 많았다.
전개 — 4월 26일, 조령이냐 들판이냐
신립은 조령, 곧 문경새재를 살펴보았다. 종사관 김여물 등은 이 험한 고갯길에서 일본군을 막자고 했다. 좁은 산길에서는 적이 많아도 한꺼번에 덤빌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신립은 기병을 쓸 수 있는 들판을 택했다. 그는 충주로 군사를 돌려,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탄금대 앞에 강을 등지고 진을 쳤다. 일본군은 지키는 사람 없는 조령을 넘어왔다.
결말 — 4월 28일, 탄금대
4월 28일, 일본군은 단월역 쪽으로 나와 충주를 에워쌌다. 일부 자료는 날짜를 조금 달리 적는다. 조선 기병이 돌격했지만 논밭과 습지에 발이 묶였고, 일본군은 사방에서 조총을 쏘며 포위했다. 조선군은 무너졌다. 신립과 김여물은 강에 몸을 던졌다.
패한 소식을 들은 선조는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5월 3일, 한양이 함락되었다. 부산에 일본군이 오른 지 20일 만이었다.
날짜로 보는 스무 날
- 4월 13일 일본 제1군이 부산 앞바다에 닿는다.
- 4월 14일 부산진성 함락. 첨사 정발이 전사한다.
- 4월 15일 동래성 함락. 부사 송상현이 전사한다.
- 4월 17일 무렵 조정에 급보가 닿는다. 이일과 신립을 내려보낸다.
- 4월 25일 상주에서 이일이 진다.
- 4월 26일 신립이 조령을 살피고 충주로 물러나 진을 친다.
- 4월 27일 무렵 일본군이 지키는 사람 없는 조령을 넘는다.
- 4월 28일 탄금대에서 조선 주력군이 무너진다.
- 4월 30일 선조가 한양을 떠난다.
- 5월 3일 한양 함락.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은 200년 가까이 큰 전쟁을 겪지 않았다. 북쪽 국경에서 여진과 작은 싸움을 했을 뿐, 남쪽 바닷가는 대규모 침략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군역을 지는 사람이 군포를 내고 빠지는 일이 흔해져, 장부에 적힌 군사와 실제로 싸울 수 있는 군사의 차이도 컸다.
방어 체계도 문제였다. 당시 조선은 적이 쳐들어오면 여러 고을의 군사를 한곳에 모아 놓고, 서울에서 내려온 장수가 그들을 이끄는 방식을 썼다. 이를 제승방략 체제라 한다. 이일과 신립이 급히 내려간 것도 이 방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수가 닿기 전에 모인 군사들이 흩어지거나, 장수와 군사가 서로를 모른 채 싸워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반면 일본군은 오랜 내전을 거치며 조총을 다루는 법과 대규모 부대를 움직이는 법을 익힌 군대였다. 탄금대의 패배는 한 장수의 판단과 함께, 이런 구조의 약점이 한꺼번에 드러난 결과였다.
『징비록』이 남긴 장면
이 싸움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은 당시 나랏일을 맡았던 류성룡이 전쟁 뒤 고향 안동으로 물러나 쓴 『징비록』이다. 지금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징비록』은 전쟁 전 류성룡이 일본군의 조총을 걱정하자 신립이 그 총이 쏠 때마다 맞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적었다. 또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면서, 이렇게 험한 곳을 두고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 총병은 꾀가 없는 사람이라고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실었다.
다만 『징비록』은 전쟁을 돌아보며 뉘우치고 경계하려고 쓴 책이다. 지은이 자신이 신립을 보낸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다른 기록과 함께 읽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주요 인물
- 신립
- 삼도도순변사. 1583년 북쪽 국경에서 여진의 난을 막아 이름을 얻었다.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패해 강에 몸을 던졌다.
- 김여물
- 신립의 종사관. 조령에서 막자고 했으며, 탄금대에서 신립과 함께 죽었다. 신립이 직접 청해 데려간 사람이라고 전한다. 그의 아들 김류는 뒷날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이 되었다.
- 이일
- 순변사. 상주에서 패한 뒤 신립의 군대에 합류했다.
- 류성룡
- 도체찰사. 신립을 내려보냈고, 뒤에 『징비록』을 남겼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 제1군의 장수. 부산에서 한양까지 가장 먼저 올라왔다.
신립의 선택을 두고 갈리는 평가
탄금대의 패배는 오랫동안 신립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훈련이 덜 된 군사들은 산길에서 흩어져 달아나기 쉬웠고, 강을 등지면 물러설 곳이 없으니 끝까지 싸운다는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신립이 믿은 기병은 조선이 북방에서 가장 잘 쓰던 무기였다. 조령을 지켰더라도 일본군이 다른 고갯길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다만 그날의 들판은 기병이 달리기에 좋지 않았고, 일본군의 조총과 포위 전술을 막지 못했다.
탄금대에 얽힌 원혼 이야기 같은 설화가 전하지만 역사 기록은 아니다. 기록이 말하는 것은 조선이 내세울 수 있었던 주력 부대가 하루 만에 사라졌고, 그 뒤 한양까지 일본군을 막을 군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정은 이 패배를 겪은 뒤 조령에 관문을 쌓아 고갯길을 지키게 했다. 지금의 문경새재 관문들은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쌓고 고친 것이다.
오늘날의 탄금대
탄금대는 충북 충주의 남한강 가에 있는 낮은 언덕이다. 이름은 신라 때 가야에서 온 악사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탔다는 이야기에서 왔다고 전한다. 지금은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어 공원으로 꾸며져 있고, 신립과 이곳에서 숨진 군사들을 기리는 비와 탑이 서 있다. 음악의 언덕과 패전의 언덕이라는 두 기억이 한자리에 겹쳐 있는 곳이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조령 아래 마을의 사냥꾼, 김여물 휘하의 젊은 군관, 충주 관아의 늙은 아전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조선 선조 25년, 문경 조령과 충주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임진년 사월 열사흘, 왜군이 부산포에 올랐다. 부산진과 동래성이 잇따라 무너지고,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앞장선 부대)은 북으로 올라온다.
조정은 이름난 장수 신립을 내려보냈다. 급히 모은 군사들 대부분은 칼을 처음 잡아 보는 이들이다. 신립을 돕는 참모 김여물은 험한 고갯길 조령(문경새재)에서 막자고 한다.
신립은 기병을 쓸 수 있는 들판을 골라 충주 탄금대(남한강 가의 언덕) 앞에 진을 친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592년 4월 중순, 급보가 한양에 닿은 뒤
부산과 동래가 무너졌다는 급보가 올라오자 조정은 장수 이일과 신립을 잇달아 내려보냈다. 충주와 문경 고을에 군사를 모으라는 영이 떨어진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조령의 산길과 샛길, 물길을 지도로 그린다 정보
좁은 고갯길 어디서 적을 막을지 정확히 안다. - 문경·연풍의 산척과 장정을 모은다 사람
고갯길을 잘 아는 활잡이들이 내 편이 된다. - 관아 창고의 군량과 화살 일부를 산으로 옮긴다 재물
고개에서 오래 버틸 식량과 화살이 생긴다.
넷째 장 · 전개 — 1592년 4월 25일, 상주 싸움 뒤
상주에서 이일의 군사가 무너졌다. 살아남은 군사들이 고개를 넘어 도망쳐 오고, 이일도 신립의 진으로 향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상주에서 도망쳐 온 군사에게 조총 이야기를 듣는다 정보
일본군의 새 무기와 싸우는 방식을 미리 안다. - 협곡 길목에 목책을 박고 돌무더기를 쌓는다 힘
고개가 막혀 적이 한 줄로만 지나게 된다. - 활 솜씨를 보여 신립 군막의 눈에 든다 이름
신립 앞에 나서서 말할 자리가 생긴다.
다섯째 장 · 전개 — 1592년 4월 하순, 충주 단월역
신립의 군사가 충주에 닿았다. 김여물은 조령을 지키자 하고, 이일은 상주에서 본 왜군을 이야기한다. 신립은 아직 말이 없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힘(무력·조직),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김여물을 찾아가 조령 지도를 함께 본다 사람
작전 회의에서 조령 지도를 펼 수 있게 된다. - 산척들을 조령 바위 뒤에 미리 세워 둔다 힘
깃발 하나로 고개 위에서 화살을 퍼부을 수 있다. - 충주 군량을 남한강 배에 실어 둔다 재물
충주가 무너져도 일본군이 식량을 얻지 못한다.
여섯째 장 · 그날 — 1592년 4월 하순, 충주 군막 회의
군막 회의가 열렸다. 신립은 들판에서 기병으로 싸우겠다 하고, 김여물의 조령 안은 기각되려 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협곡에서 늦추고 들판으로 끌어내는 지도를 편다 정보
일본군이 고개에 묶여 한양이 대비할 시간을 번다. - 김여물과 이일이 함께 신립을 설득하게 한다 사람
신립이 조령을 지켜 일본군의 북진이 막힌다. - 산척과 장정들로 조령을 먼저 막고 신립에게 보인다 힘
조령이 막혀 일본군이 두 주 가까이 늦어진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의 군사는 일본군에 둘러싸여 무너졌고, 신립과 김여물은 강에 몸을 던졌다. 패보를 들은 선조는 곧 한양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삼도도순변사
- 세 도의 군사를 맡아 지휘하는 장수
- 종사관
- 장수 곁에서 일을 돕는 관리
- 배수진
- 강을 등지고 친 진
- 파천
-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함
- 조총
- 일본군이 쓴 화승총. 불붙인 심지로 화약을 터뜨려 쏘았다
- 선봉
- 앞장선 부대
- 탄금대
- 남한강 가의 언덕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1592년, 조령이냐 들판이냐.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