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

1590년 · 조선 · 막기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 — 엇갈린 두 보고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590년 · 조선 선조 23년
어디서
교토와 한양
무슨 일
1590년, 조선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사신단(통신사)을 보냈다. 돌아온 두 사신은 전쟁이 난다, 안 난다로 서로 다르게 보고했다.
무엇이 문제였나
조정은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쳐들어왔고, 7년 동안 이어진 전쟁(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짓밟혔다.
이야기 속 목표
일본에 다녀온 두 사신의 보고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로 하나가 되게 만든다

배경: 통일된 일본의 요구

16세기 말, 오랜 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하나로 묶은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대마도 영주 소 요시토시를 앞세워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라고 거듭 요구했다. 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공식 사신단이다. 1587년부터 1589년까지 대마도 쪽의 요청이 이어졌고, 조선은 손죽도 왜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돌려보내라는 조건을 걸었다. 대마도 쪽이 이 조건을 들어주자 조선은 통신사를 보내기로 했다.

조선 조정이 알고 싶었던 것은 하나였다. 일본이 정말 쳐들어올 생각인가. 통신사는 그 답을 가지고 돌아와야 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590년 3월, 사신단이 떠나다

1590년 3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으로 꾸린 통신사가 한양을 떠났다. 일행은 대마도에 머문 뒤 7월에야 교토에 닿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곧바로 사신을 만나 주지 않았다. 일행은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전개 — 1590년 11월, 교토의 접견과 답서

11월, 통신사는 마침내 관백 히데요시를 만나 국서를 전했다. 접견 자리의 예법을 두고 논란이 있었고, 돌려받은 답서는 더 큰 문제였다. 답서에는 한 번에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다는 뜻과 함께, 조선이 앞장서 따라오라는 듯한 말이 담겨 있었다. 김성일은 조선을 낮추어 부른 몇몇 글자를 고쳐 달라고 요구했고, 일부는 고쳐졌지만 명을 치겠다는 대목은 그대로 남았다. 일행은 이듬해 1월 귀국길에 올랐다.

결말 — 1591년 3월, 선조 앞의 두 보고

1591년 3월, 통신사는 한양에서 선조에게 돌아온 결과를 아뢰었다.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 곧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사 김성일은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서장관 허성은 김성일과 같은 동인이었지만 황윤길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진짜 뜻을 묻자, 김성일은 자신도 전쟁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 안의 민심이 흔들릴까 걱정된다는 뜻을 비쳤다고 전한다.

그 뒤 일본의 외교승 겐소는 명나라를 치러 갈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를 직접 입에 올렸다. 조정은 몇몇 성을 고치고 장수를 새로 두었다. 통신사가 돌아오기 앞서 1591년 2월에는 류성룡의 천거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성을 고쳐 쌓는 일도 벌어졌지만, 오히려 백성의 원성을 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전쟁에 대비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올랐다.

두 사람이 본 히데요시

두 보고가 갈린 것은 전쟁 여부만이 아니었다. 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히데요시가 어떻게 생겼더냐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여 담과 꾀가 있어 보인다고 했고,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아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을 보고도 정반대로 말한 것이다.

김성일의 속뜻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더 자세히 나온다. 류성룡이 따로 물었을 때 김성일은 자기도 일본이 끝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나라 안이 놀라 흔들릴까 걱정되어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전쟁을 몰랐다기보다, 전쟁을 말하는 방식을 두고 판단이 갈렸다고 볼 수도 있다.

주요 인물

황윤길
통신사 정사. 서인. 돌아와 반드시 전쟁이 있으리라 보고했다.
김성일
통신사 부사. 동인. 전쟁의 낌새를 보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전쟁이 나자 경상우도 초유사로 의병을 모으는 데 힘쓰다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허성
통신사 서장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선조
조선의 왕. 두 보고를 함께 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을 통일한 관백. 통신사를 불러들이고 명나라를 치겠다는 답서를 보냈다.
소 요시토시와 겐소
대마도 영주와 외교승.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섭을 맡았다.

사료와 기록

이 장면을 전하는 기록은 여럿인데, 누가 언제 썼는지에 따라 결이 다르다. 두 사람의 보고와 히데요시의 생김새 문답은 『선조수정실록』 1591년 3월 조에 실려 있다. 수정실록은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 뒤 서인이 주도해 고쳐 엮은 것이라, 동인이었던 김성일을 보는 눈이 곱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읽어야 한다.

당사자의 기록도 남아 있다. 김성일은 사행 중에 쓴 시와 글, 일본 쪽과 예법을 두고 다툰 편지를 『해사록』으로 남겼다. 여기에는 그가 조선 사신의 체면을 지키려 얼마나 애썼는지가 잘 드러난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전쟁의 원인과 대비를 돌아보며 쓴 책으로, 이 사행과 그 뒤 조정의 판단을 반성하는 대목이 있다.

그 뒤에 일어난 일

전쟁이 터지자 선조는 김성일을 잘못 보고한 죄로 잡아 오게 했다가, 류성룡 등의 변호로 풀어 주고 경상우도 초유사로 보냈다. 김성일은 흩어진 관군과 백성을 달래 모으고 곽재우 같은 의병장을 도우며 진주성 방어를 거들었고, 1593년 진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황윤길에 대해서는 그 뒤의 기록이 많지 않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끊겼다가, 1607년 조선이 사신을 보내면서 다시 이어졌다. 이때부터 1811년까지 열두 차례 일본에 간 사신단이 흔히 말하는 조선 통신사다. 1590년의 사행은 그 앞에 있었던, 전쟁 직전의 마지막 사행이었다.

더 알아 둘 점

이 일은 흔히 당파 싸움 때문에 전쟁 대비를 못 했다는 이야기로 줄여 말해진다. 황윤길은 서인이고 김성일은 동인이었으니 그렇게 보일 만하다. 그러나 같은 동인인 허성이 황윤길 편에 섰고, 조정도 아무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보고 하나가 아니라, 전쟁이 얼마나 클지 아무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이 글은 실록과 『징비록』이 전하는 말을 따랐지만, 두 사람의 보고가 실제로 얼마나 단호했는지는 기록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임진왜란’이라는 이름도 전쟁이 끝난 뒤에 붙은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왜변이나 왜란이라고 불렀다. 통신사가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사이에서 조선은 7년 전쟁을 맞았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통신사를 따라간 견습 역관, 사행선의 노 젓는 격군, 서장관 허성을 모시는 서리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조선 선조 23년, 교토와 한양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일본을 하나로 묶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마도 영주 소 요시토시를 앞세워 통신사(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사신단)를 보내라 거듭 청했다. 1590년 삼월, 조선은 사신단의 우두머리 황윤길, 둘째 김성일, 기록을 맡은 허성을 일본으로 보낸다.

일행은 교토에서 몇 달을 기다린 끝에 십일월에야 관백(일본의 최고 실권자) 히데요시를 만난다. 돌려받은 답서에는 명나라를 치겠다는 뜻이 적혀 있다.

이듬해 봄 한양에서,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전쟁)가 있으리라 아뢰고 김성일은 그런 낌새를 보지 못했다고 아뢴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590년 3월, 한양을 떠나며

사행에는 임금의 국서와 인삼·호피 같은 예단(나라끼리 주고받는 선물)이 실렸다. 대마도로 가는 뱃길에서 일행은 벌써 서로 다른 눈으로 바다 건너를 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재물(물자),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590년 7월~10월, 교토

일행은 칠월에 교토에 닿았지만, 관백은 동쪽 싸움터에서 돌아오지 않아 넉 달 동안 만날 수 없었다. 기다리는 사이 거리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늘어 간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590년 11월, 관백 접견 뒤 귀국길

관백은 국서를 받았지만 답서에는 명을 치겠다는 뜻이 담겼다. 김성일은 문구를 고치라 요구하고, 일행은 대마도를 거쳐 돌아오는 배에 오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591년 3월, 한양 대궐

선조 앞에서 복명(다녀온 일을 임금께 아뢰는 것)할 날이 밝았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대궐로 들어가기 전, 내 손에는 사행에서 모은 것들이 있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조정은 성 몇 곳을 고치고 장수를 새로 두었지만 전면적인 대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듬해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올랐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정사·부사
사신단의 우두머리와 그다음 자리
서장관
사신단의 기록을 맡은 관리
정명가도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빌려 달라는 뜻
국서
나라의 임금이 다른 나라에 보내는 공식 편지
통신사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사신단
관백
일본의 최고 실권자
예단
나라끼리 주고받는 선물
복명
다녀온 일을 임금께 아뢰는 것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590년, 엇갈린 두 보고.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