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병자호란

1636년 · 조선 · 막기

병자호란 — 봉화와 강화도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636년 · 조선 인조 14년
어디서
압록강에서 강화도까지
무슨 일
1636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에 신하의 나라가 되라며 쳐들어왔다(병자호란). 왕(인조)은 남한산성에 갇히고, 왕실은 강화도로 피했다.
무엇이 문제였나
강화도가 무너지자 버틸 힘을 잃은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엎드려 항복했다. 세자와 대군이 볼모로 청에 끌려갔다.
이야기 속 목표
강화도가 그 겨울을 버티게 해, 왕이 청 황제에게 무릎 꿇는 날이 오지 않게 만든다

배경: 형제에서 군신으로

1627년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맹약했다. 그러나 후금은 계속 세력을 넓혔다. 1636년 2월부터 4월 사이, 후금의 사신이 와서 홍타이지가 황제가 된다고 알리며 조선도 이를 받들라고 했다. 조선 조정은 이를 거부했고, 사신이 달아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4월 홍타이지는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황제에 올랐다. 즉위식에 간 조선 사절은 절하기를 거부했다.

조정의 분위기는 척화론, 곧 청과 화친하지 말자는 쪽이 우세했다. 조선은 명나라를 섬겨 왔고, 임진왜란 때 명이 군대를 보내 준 일을 큰 은혜로 여겼다. 그런 조선에게 청을 황제로 받드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김상헌이 대표적인 척화론자였고, 최명길은 화친으로 나라를 보전하자는 주화론을 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군

1636년 12월 9일,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은 의주 백마산성의 의주부윤 임경업과 황해도 정방산성의 도원수 김자점처럼 산성을 거점으로 막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청군의 선봉은 이 산성들을 싸우지 않고 지나쳐 곧장 한양으로 내달렸다. 봉화와 장계로 전해져야 할 급보는 늦었고, 조정이 소식을 받은 것은 12일이었다.

전개 — 12월 14일, 남한산성으로

13일과 14일 사이 조정은 강화도로 피하기로 했다. 종묘의 신주와 세자빈, 원손, 왕자들이 먼저 강화도로 갔다. 그러나 인조는 청군에게 길이 막혀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일에는 청의 선봉이 남한산성을 에워쌌다. 성안의 식량은 50일 남짓 버틸 만큼이었다. 각지에서 근왕군이 올라왔고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분전했지만, 근왕군은 잇따라 패하고 흩어졌다. 해가 바뀔 무렵에는 홍타이지가 직접 성 앞에 이르렀다.

결말 — 1637년 1월 22일과 30일

1월 22일, 청군이 배를 타고 건너와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강화를 맡은 강화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은 섬을 지켜 내지 못했다. 피란해 있던 왕실 사람들이 붙잡혔다. 마지막 기댈 곳이 무너지자 인조는 더 버틸 수 없었다.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한강 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올렸다. 2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를 주장한 신하들이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갔다.

연표로 보는 두 달

남한산성의 마흔일곱 날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간 날부터 성을 나온 날까지는 흔히 47일로 센다. 성은 산 위에 있어 지키기에는 좋았지만, 한겨울에 밖과 길이 끊기면 버틸 힘은 식량과 땔감에 달려 있었다. 성을 지키는 일은 수어사 이시백 등이 맡았다. 추위 속에서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이 얼고 굶주렸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 있다.

성안의 논쟁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최명길은 청에 보낼 화친의 글을 썼고, 김상헌은 그 글을 찢으며 통곡했다고 전한다. 최명길이 찢긴 종이를 주워 다시 붙였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하는데, 이 장면은 뒤에 여러 기록과 이야기로 퍼진 것이다. 성 밖의 근왕군은 끝내 포위를 풀지 못했고, 강화도마저 무너졌다는 소식이 닿자 조정은 항복을 받아들였다.

사료와 기록

병자호란의 흐름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인조실록』에 날마다 적혀 있다. 그 밖에 성안에 있던 나만갑이 쓴 『병자록』, 지은이가 분명하지 않은 한글 일기 『산성일기』 등이 남한산성 안의 사정을 전한다. 청나라 쪽 기록도 있어 서로 견주어 볼 수 있다. 같은 일이라도 기록마다 날짜와 숫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다르다.

항복한 자리에는 뒤에 청의 요구로 청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흔히 삼전도비라 부르는 이 비는 지금 서울 송파구에 남아 있어, 부끄러운 역사도 지워 버리지 않고 남겨 두는 까닭을 생각하게 한다.

주요 인물

인조
조선의 왕.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홍타이지(청 태종)
후금의 칸에서 청의 황제가 되었다. 직접 남한산성 앞에 왔다.
최명길
주화론자. 나라를 보전하려 화친을 주장했다.
김상헌
척화론자. 끝까지 항복에 반대했고, 뒤에 청에 끌려갔다.
임경업과 김자점
백마산성과 정방산성을 지킨 장수. 청군은 두 산성을 우회했다.
김경징과 장신
강화도 방어를 맡았으나 섬을 지키지 못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조의 아들들. 볼모로 심양에 끌려갔다. 봉림대군은 뒤의 효종이다.

그 뒤에 일어난 일

조선은 청을 임금의 나라로 섬기게 되었고, 명과의 관계를 끊어야 했다. 수많은 백성이 청으로 끌려갔는데, 그 수는 수만에서 수십만까지 여러 설이 있어 정확히 알기 어렵다. 돈을 내고 가족을 되찾아 오는 일도 이어졌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8년 가까이 머물며 청의 사정과 서양의 학문을 접했지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왕위에 오른 효종은 청을 치자는 북벌을 내세웠다. 병자호란의 상처는 조선 후기 내내 사람들의 생각과 정치에 깊이 남았다.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더 알아 둘 점

병자호란을 이야기할 때 최명길과 김상헌은 흔히 맞서는 두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위한 길을 고민했다. 한쪽은 지금 살아남는 길을, 다른 쪽은 지켜야 할 명분을 택했을 뿐이다. 어느 한쪽을 악역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김경징과 김자점에 대한 비판은 사료에도 남아 있다.

청군이 산성을 우회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방어 계획 자체가 빗나갔음을 보여 준다. 급보가 사흘 늦게 닿았고, 그 사흘 동안 왕이 갈 길이 막혔다. 이 글의 날짜는 음력이다. 이때 함께 쓰인 ‘오랑캐’라는 말은 당시 조선 쪽의 표현이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황해도 봉수대의 봉수군, 강화 갑곶 나루의 사공, 남한산성 성첩을 지키는 승군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조선 인조 14년, 압록강에서 강화도까지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9년 전 조선과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약속했던 후금(만주족의 나라)이 1636년 사월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홍타이지가 황제가 되었다. 조선에도 신하가 되라 했지만 조정은 척화(화친을 물리침)를 택했다.

그해 십이월 초아흐레,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청군은 의주와 황해도의 산성들을 싸우지 않고 지나쳐 곧장 한양으로 내달린다. 급보가 조정에 닿은 것은 사흘 뒤였다.

왕실은 강화도로 가고,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이듬해 정월 스무이틀 강화도가 떨어지고, 여드레 뒤 삼전도(한강 가 나루, 지금의 서울 송파)에서 항복의 예가 치러진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636년 가을, 척화의 목소리가 높던 무렵

청의 사신이 쫓기듯 돌아간 뒤, 조정에서는 싸우자는 김상헌과 화친하자는 최명길이 부딪친다.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손보라는 영이 내려오지만 손은 더디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636년 12월 9일~12일, 청군이 압록강을 건넌 뒤

청군이 산성들을 지나쳐 내달린다. 봉화는 중간에서 끊기고, 장계는 말에 실려 느리게 올라간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637년 1월, 강화도

남한산성은 포위되었고 근왕군은 잇따라 패했다. 강화도에서는 바다가 막아 주리라 믿는 이가 많다. 강화도를 맡은 김경징과 장신의 군막은 조용하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힘(무력·조직), 정보(지식)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637년 1월 22일, 강화 갑곶

안개 낀 염하 건너편에서 청군의 배가 물때를 기다린다. 강화가 버티면 남한산성 안의 협상도 달라진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피란한 왕실 사람들이 붙잡혔다.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올렸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끌려갔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척화론
청과 화친하지 말자는 주장
주화론
화친으로 나라를 보전하자는 주장
근왕군
왕을 구하러 각지에서 올라온 군대
수어사
남한산성을 지키는 수어청의 우두머리
볼모
약속을 지키게 하려고 붙잡아 두는 사람
국서
나라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보내는 글
후금
만주족의 나라
척화
화친을 물리침
삼전도
한강 가 나루, 지금의 서울 송파
봉수대
불과 연기로 급한 소식을 잇는 곳
염하
강화도와 육지 사이 좁은 바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636년, 봉화와 강화도.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