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신미양요

1871년 · 조선 · 막기

신미양요 — 광성보의 수자기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871년 · 조선 고종 8년
어디서
강화해협과 광성보
무슨 일
1871년 미국 군함 다섯 척이 강화도에 와서 허락 없이 물길을 재다 조선과 싸웠다(신미양요). 미군은 강화의 요새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무엇이 문제였나
광성보를 지키던 장수 어재연과 군사 대부분이 한 시간 남짓한 싸움 끝에 전사했고, 장수의 깃발인 수자기를 미군에게 빼앗겼다.
이야기 속 목표
광성보를 지키던 군사들이 장수의 깃발(수자기)과 함께 살아남게 만든다

배경: 다섯 해 전의 셔먼호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불타고 선원이 모두 죽은 일이 있었다. 같은 해 가을에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쳤다가 물러간 병인양요도 있었다. 조선은 서양 배를 막아 낸 경험으로 강화의 방비를 더 단단히 했다.

미국은 셔먼호 일을 따지고 조선과 통상 조약을 맺으려 했다. 그 임무는 중국에 있던 미국 공사 로우와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맡겨졌다. 로우가 협상의 전권을, 로저스가 함대를 이끌었다. 군함 5척, 병력 1,230명, 대포 85문이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871년 음력 3월, 나가사키를 떠나다

미국 함대는 음력 3월 27일(양력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강화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들은 조선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강화 해협의 물길을 재겠다고 일방적으로 알렸다. 강화 해협은 서울로 가는 뱃길의 길목이었다.

전개 — 손돌목 포격과 열흘의 대치

음력 4월 14일(양력 6월 1일), 미국 측량선이 물살이 센 좁은 물목 손돌목에 들어서자 강화의 포대가 포를 쏘았다. 미국은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협상할 사람을 보내라고 했고, 열흘 뒤 상륙하겠다고 예고했다. 조선은 남의 바다에 함부로 들어온 쪽이 잘못이라며 거절했다. 주권을 침해한 것은 미국이라는 입장이었다.

결말 — 음력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에서 광성보까지

음력 4월 23일(양력 6월 10일), 미군이 함포로 초지진을 두드린 뒤 상륙해 점령했다. 이튿날 덕진진을 싸움 없이 차지한 미군은 광성보를 공격했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600여 군사로 지키고 있었다. 미군의 포격에 이어 맞붙어 싸우는 백병전이 벌어졌고, 한 시간 남짓한 싸움 끝에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어재연과 그 동생 어재순, 그리고 수비군 대부분이 전사했다. 장수가 있는 곳을 알리는 수(帥)자 기도 미군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미국 함대는 조선이 끝내 협상에 응하지 않자 통상 조약을 얻지 못한 채 음력 5월(양력 7월 3일) 물러갔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서양을 물리친 일로 여기고,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 싸우지 않고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라는 뜻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음력과 양력으로 맞춰 본 날짜

조선의 기록은 음력으로, 미국의 기록은 양력으로 날짜를 적었다. 그래서 같은 날이 자료에 따라 다른 숫자로 나오곤 한다.

주요 인물

어재연
진무중군. 미국 함대가 오자 급히 강화 방어를 맡아 광성보로 왔고, 그곳에서 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어재순
어재연의 동생. 벼슬 없이 형을 따라 나섰다가 광성보에서 함께 전사했다고 전한다.
흥선대원군
고종의 아버지로 나라를 이끌며 통상을 거부했고, 척화비를 세웠다.
로저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강화도 공격을 지휘했다.
로우
중국 주재 미국 공사. 조선과의 협상 전권을 맡았다.

미국 쪽에서 본 신미양요

미국은 이 원정을 ‘조선 원정’이라 불렀다. 로우와 로저스는 무력을 보여 주면 조선이 협상 자리에 나오리라고 기대했다. 광성보를 차지한 뒤에도 그들은 조선 조정이 사람을 보내 오기를 기다렸지만, 조선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함대는 싸움에서 이기고도 바라던 조약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미국 안에서도 이 원정이 무엇을 얻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이 원정에는 사진가가 함께 왔다. 그가 찍은 광성보의 모습과 붙잡힌 조선 군사들의 사진은 조선을 찍은 아주 이른 시기의 사진으로 꼽힌다. 사진 속 수비군의 무기와 옷차림은 양쪽의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준다. 조선 군사들은 화승총과 칼, 창으로 싸웠고, 미군은 뒤에서 탄을 재는 신식 소총과 함포를 썼다. 그런데도 수비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 쪽 기록에도 조선 군사들이 끝까지 싸웠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엇갈리는 숫자

광성보 싸움의 희생자 수는 기록에 따라 크게 다르다. 조선 쪽 기록은 전사자를 50여 명으로, 미군 쪽 기록은 350명 안팎으로 적었다. 미군 쪽 전사자는 3명이었다고 전한다. 숫자가 이렇게 다른 것은 셈한 사람과 방식이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 수비군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는 점은 같다. 무기의 차이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뒤에 일어난 일

신미양요는 조선이 싸움에서는 졌지만 미국 함대를 돌려보낸 일로 기억되었고, 그 기억이 쇄국을 더 굳혔다. 그러나 몇 해 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나라의 문이 열렸다.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맺은 것은 11년 뒤인 1882년이었다. 조선이 서양 나라와 맺은 첫 조약이다. 이 무렵 척화비는 대부분 뽑혀 묻혔고, 지금은 몇몇 고장에 남은 비가 그 시대를 전한다.

빼앗긴 수자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2007년 장기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돌려받은 것이 아니라 빌려 온 것이라는 점에서, 이 깃발은 지금도 그 싸움의 무게를 보여 준다.

오늘날 강화에 남은 자리

강화 해협을 따라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가 차례로 남아 있다. 덕진진에는 외국 배는 함부로 지나가지 말라는 뜻을 새긴 경고비가 서 있다. 광성보 안에는 어재연 형제를 기리는 쌍충비각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자들을 함께 묻은 신미순의총이 있고, 손돌목을 내려다보는 손돌목돈대도 남아 있다. 강화는 고려 때 몽골을 피해 도읍을 옮긴 섬이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몇 해 뒤의 운요호 사건이 잇따라 일어난 서울의 바닷길 관문이었다. 광성보의 용두돈대에 서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 쪽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이 좁은 물길이 그날의 싸움터였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광성보 돈대의 포수, 강화 진무영의 문서 맡은 서리, 강화 갯마을의 젓갈 장수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조선 고종 8년, 강화해협과 광성보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다섯 해 전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일을 따지겠다며,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다섯 척과 군사 천이백여 명을 이끌고 강화 앞바다에 왔다. 그들은 조선의 허락 없이 강화 해협(강화도와 육지 사이 좁은 바다)을 측량하겠다고 알렸다.

신미년 사월, 물길을 재는 배가 손돌목(물살 센 좁은 물목)에 들어서자 강화의 포대(대포 진지)가 포를 쏜다. 미군은 사과와 협상을 요구하며 열흘 뒤 상륙하겠다고 하고, 조정은 남의 바다를 함부로 넘본 쪽이 잘못이라며 맞선다.

사월 스무사흘 미군이 초지진(강화 바닷가 요새)에 오르고, 이튿날 광성보를 친다. 조선 장수 어재연과 군사들이 그곳을 지키고, 돈대(바닷가 작은 포대) 위에는 장수의 수(帥)자 기가 펄럭인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871년 4월 초, 강화 앞바다

쇠로 덮인 배들이 강화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섬사람들은 갯가에 나와 연기 뿜는 배를 구경하고, 진무영(강화를 지키는 군영)은 수상한 배를 지켜보라는 공문만 내려보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재물(물자),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871년 4월 중순, 손돌목 포격 뒤

손돌목에서 포성이 오간 뒤 미군은 열흘 말미를 주었다. 진무영에는 군사가 더 내려오고, 어재연이 광성보를 맡는다는 말이 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정보(지식),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871년 4월 23일, 초지진이 떨어진 날

초지진이 함포 사격에 무너지고 미군이 올라왔다. 내일이면 덕진진을 지나 광성보에 닿는다. 어재연은 물러서지 않겠다며 수자기를 높이 세웠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871년 4월 24일, 광성보

덕진진을 싸움 없이 지난 미군이 광성보로 다가온다. 바다 위 군함들의 포구가 일제히 돈대를 향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광성보는 한 시간 남짓한 포격과 싸움 끝에 함락되어 어재연·어재순 형제와 수비군 대부분이 전사했고, 수자기는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진무중군
강화를 지키는 진무영의 중군 장수
전권
나라를 대신해 협상할 모든 권한
척화비
서양과 화친하지 말자는 뜻을 새긴 비석
백병전
칼이나 창으로 맞붙어 싸우는 싸움
돈대
바닷가 언덕에 쌓은 작은 포대 겸 감시 시설
양요
서양 나라가 일으킨 소란이라는 뜻
해협
강화도와 육지 사이 좁은 바다
손돌목
물살 센 좁은 물목
포대
대포 진지
초지진
강화 바닷가 요새
진무영
강화를 지키는 군영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871년, 광성보의 수자기.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