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부산진·동래성 전투

1591년 · 조선 · 막기

부산진·동래성 전투 — 동래성의 하루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591년 · 조선 선조 24년
어디서
부산진과 동래성
무슨 일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해 조선을 쳤다(임진왜란). 부산진성에 이어 이틀 뒤 동래성이 일본군에 에워싸였다.
무엇이 문제였나
동래성은 반나절 만에 무너져 동래부사 송상현과 군사·백성 3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그 길로 한양까지 올라갔다.
이야기 속 목표
동래성이 반나절 만에 무너지지 않고, 성안 백성이 살아서 빠져나가게 만든다

배경: 바다 건너 첫 길목

1590년 조선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속셈을 살피려 통신사를 보냈다. 이듬해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라 했고, 부사 김성일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보고가 엇갈린 뒤 조정은 몇몇 성을 고치고 장수를 뽑았지만, 대비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무렵 동래부사로 송상현이 내려왔다. 동래는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오면 가장 먼저 닿는 고을이었고, 바닷가에는 부산진과 다대포 같은 작은 군사 기지가 있었다. 부산포에는 일본 사람들이 머물며 교역하던 왜관도 있어, 일본과의 길목이자 창구였다. 부산진은 첨사 정발이 지켰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앞바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 제1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군사는 약 1만 8,700명, 배는 700여 척이었다. 이때 정발은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가 급히 성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는 적이 쓰지 못하도록 전선을 가라앉히고, 군사와 백성에게 성을 지키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개 — 4월 14일, 부산진 함락

14일 새벽,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조총을 앞세운 공격에 성은 무너졌고 정발은 싸우다 전사했다. 이 무렵 다대포첨사 윤흥신도 전사했다. 같은 날 경상좌병사 이각과 양산군수 조영규 등이 동래로 왔지만, 이각은 성 밖에서 돕겠다며 소산역 쪽으로 물러났다고 전한다.

결말 — 4월 15일, 동래성의 반나절

15일, 일본군은 동래성 앞에 이르러 팻말을 세웠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길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송상현은 목판에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써서 답했다. 일본군은 성을 세 겹으로 에워쌌고, 한 부대가 뒷산을 돌아 경사진 산 중턱의 성벽을 넘어 들어왔다.

성안에는 군사보다 백성이 많았다. 무기가 모자란 백성들도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성은 무너졌다. 송상현과 조영규를 비롯한 많은 군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 쪽 기록은 3천여 명이 죽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적었다. 일본군은 그 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한양을 향했다.

연표로 보는 사흘

사흘 사이에 바닷가의 두 성이 무너졌다. 일본군은 그 뒤 보름 남짓 만에 한양에 이르렀고, 선조는 4월 30일 새벽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피란했다.

사료와 기록

이 이틀을 전하는 기록은 여럿이다. 『선조실록』과 뒤에 고쳐 엮은 『선조수정실록』, 전쟁 때 영의정으로 나라를 이끈 유성룡이 전쟁을 돌아보며 쓴 『징비록』이 대표적이다. 일본 장수들을 따라온 사람들이 남긴 일기와 기록도 있다. 일본군의 병력 수나 동래성의 희생자 수는 주로 일본 쪽 기록에 기대고 있다.

그림도 남아 있다. 1760년 동래부의 화원 변박이 그린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다. 「동래부순절도」에는 성을 에워싼 일본군과, 지붕 위에 올라 기와를 던지는 사람들, 성 밖으로 말을 달려 빠져나가는 장수의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전투가 끝나고 170년 가까이 지난 뒤 그린 것이어서 사실 그대로라기보다, 그날을 기억하고 기리려는 뜻이 담긴 그림으로 본다.

주요 인물

송상현
동래부사. 길을 빌려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성을 지키다 전사했다.
정발
부산진첨사. 성을 지키다 4월 14일 전사했다.
조영규
양산군수. 동래성에 들어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이각
경상좌병사. 동래에 왔다가 성 밖으로 물러났다.
윤흥신
다대포첨사. 부산진 함락 무렵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일본 제1군을 이끈 장수. 부산진과 동래성을 치고 북상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곳

부산 동래구의 충렬사는 송상현을 비롯해 임진왜란 때 부산과 동래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모신 사당이다. 부산 동구에는 정발과 부산진의 군민을 기리는 정공단이 있다. 동래읍성의 성벽 일부와 북문 일대도 남아 있다.

2000년대 중반, 부산 도시철도 수안역을 짓던 공사 현장에서 동래읍성의 해자 터가 드러났다. 그 안에서는 칼과 화살촉, 갑옷 조각 같은 무기와 함께 많은 사람의 뼈가 나왔다. 그날 성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본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동래성의 하루가 땅속에서 다시 확인된 셈이다. 지금 수안역 안에는 그 발굴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 있다.

자주 헷갈리는 점

동래성 싸움의 날짜는 『선조수정실록』이 4월 14일 기사로 몰아 적는 등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상륙을 13일, 부산진 함락을 14일, 동래성 함락을 15일로 정리한다. 이 날짜들은 음력으로, 상륙한 날은 양력으로 5월 23일이다. 성이 버틴 시간을 반나절로 보는 것도 하나의 설이고, 희생자 수도 3천여 명부터 5천 명까지 여러 설이 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은 서로 다른 성이다. 부산진성은 바닷가에 있던 수군의 군사 기지였고, 동래성은 고을의 중심인 읍성으로 바다에서 몇 킬로미터 안쪽에 있었다. 일본군은 바닷가의 성을 먼저 무너뜨린 뒤 이튿날 내륙의 읍성으로 나아갔다.

일본이 내건 명분은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송상현이 남긴 답은 조선이 처음부터 길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동래성의 사람들은 성을 열지 않았다. 부산진과 동래에서 싸운 사람들 대부분은 이름 없는 군사와 백성이었고, 충렬사와 정공단은 그들을 함께 모시고 있다. 7년 전쟁의 첫 장은 이렇게 바닷가 두 성의 함락으로 시작되었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동래부 관아의 젊은 통인(심부름꾼), 황령산 봉수대(봉화 올리는 곳)의 봉수군, 동래 장터의 대장장이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조선 선조 24년, 부산진과 동래성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신묘년, 일본에 다녀온 사신(통신사)들의 보고가 "쳐들어온다"와 "아니다"로 엇갈렸다. 그해 동래부사(동래 고을 수령)로 송상현이 내려왔고, 부산진(부산 바닷가의 작은 성)은 장수 정발이 지킨다.

임진년 사월 열사흘 오후,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선(일본 배) 수백 척이 부산포 앞바다를 덮는다. 이튿날 새벽 부산진이 무너지고, 열닷새에는 동래성이 에워싸인다.

송상현은 "싸우려면 싸우고, 아니면 길을 빌려 달라"는 팻말에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답한다. 성안에는 군사보다 백성이 더 많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591년 겨울, 송상현이 부임한 뒤

바다 건너 소문이 흉흉하다. 조정은 남쪽 성들을 고치라 했지만 일손과 돈이 모자라고, 동래성 뒷산 쪽 성벽은 비탈에 낮게 걸쳐 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정보(지식),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앞바다가 왜선으로 덮인 날

절영도에서 사냥하던 정발이 급히 부산진으로 돌아왔다. 황령산 봉화가 오르고, 동래성에는 부사의 영이 떨어진다. 성 밖 마을 사람들은 짐을 싸야 할지 모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이 무너진 날

새벽에 부산진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왔다. 경상도 육군 장수 이각과 양산 고을 수령 조영규가 동래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각은 성 밖에서 돕겠다며 물러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592년 4월 15일, 동래성

왜군이 성을 세 겹으로 에워쌌다. 남문 앞에는 큰 무리가 서고, 한 무리는 뒷산 쪽으로 돌아간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4월 15일 동래성은 반나절 만에 무너졌다. 송상현과 조영규를 비롯한 군사와 백성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왜군은 곧장 한양으로 북상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첨사
진(작은 군사 기지)을 맡은 무관
경상좌병사
경상도 동쪽 육군을 지휘하는 장수
절영도
지금의 부산 영도
동래부순절도
1760년에 그린 동래성 싸움 그림
통신사
조선이 일본에 보내던 사절
해자
성 둘레에 판 물길이나 도랑
동래부사
동래 고을 수령
부산진
부산 바닷가의 작은 성
왜선
일본 배
봉수대
봉화 올리는 곳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591년, 동래성의 하루.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