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행주대첩
1592년 · 조선 · 앞당기기
행주대첩 — 행주 언덕의 목책
한눈에 보기
- 언제
- 1592년 · 조선 선조 25년
- 어디서
- 수원 독산성과 고양 행주산성
- 무슨 일
- 1593년 2월 임진왜란 때 권율이 이끈 조선군이 한강 가 행주산성에서 일본군 3만여 명을 막아 냈다(행주대첩).
- 왜 앞당기나
- 한양은 그 뒤 4월 20일에야 되찾았다. 그동안 성안 백성이 굶주려 많이 죽었으니, 빨리 이길수록 더 살린다.
- 이야기 속 목표
- 행주산성 싸움에서 이기고 한양을 되찾는 날을 앞당긴다
배경: 이치에서 독산성으로
1592년 여름, 광주목사 권율은 동복현감 황진 등과 함께 전라도로 넘어오는 고개 이치(배티)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을 막았다. 황진은 이 싸움에서 다치면서도 앞장서 싸운 것으로 이름을 남겼다. 바다에서 이순신이 전라도를 지켰다면, 땅에서는 이치가 전라도로 오는 길을 막은 셈이다. 그 공으로 권율은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그해 12월, 권율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 수원 독산성(독성산성)에 진을 쳤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괴롭혔다. 한양은 이미 여덟 달째 일본군의 손에 있었고, 성안의 백성은 굶주리고 있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593년 1월, 평양 수복과 벽제관
1593년 1월 8일,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을 되찾았다.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오던 명군은 1월 27일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지고 물러났다. 명의 장수 이여송은 이 싸움 뒤 개성 쪽으로 물러나 더 나서기를 꺼렸고, 한양 앞의 싸움은 조선군의 몫으로 남았다. 한양을 되찾으려면 누군가 한양 가까이에서 버텨야 했다.
전개 — 2월 초, 행주에 목책을 세우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에게 진을 칠 곳을 찾게 했다. 권율 자신은 안현을 원했지만 막하의 반대로 한강 가 행주로 정했다. 조경은 이틀 만에 목책을 세웠다. 권율은 독산성에 소수의 군사만 남겨 그대로 있는 것처럼 꾸미고 행주로 옮겼다. 바깥에서는 선거이가 4천 명을 이끌고 금천에서, 변이중이 1천 명을 이끌고 양천에서 일본군을 견제했다. 승장 처영이 승병 1천을 이끌고 합류했다.
결말 — 2월 12일, 행주산성
2월 12일 새벽,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끈 일본군 3만여 명이 일곱 부대로 나뉘어 차례로 산성을 공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구로다 나가마사, 깃카와 히로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같은 장수들이 함께였다. 조선군은 화차와 수차석포, 진천뢰와 총통을 쏘고, 이중 목책 뒤에서 재 주머니와 돌을 던지며 막았다. 화살이 떨어질 무렵, 경기수사 이빈이 화살을 실은 배 두 척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일본군은 물러갔다.
싸움 뒤 권율은 파주산성으로 옮겼고 도원수가 되었다. 일본군은 4월 18일 한양에서 물러났고, 조선은 4월 20일 한양을 되찾았다.
산성을 지킨 것들
행주산성은 높은 산성이 아니다. 한강 가에 솟은 덕양산의 낮은 언덕에 주로 흙으로 쌓은 성으로, 남쪽과 서쪽은 물에 닿아 가파르고 동쪽과 북쪽이 비교적 완만하다. 권율이 이곳을 고른 데에는 강이 뒤를 막아 주고, 강을 통해 물자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실제로 그날 화살은 강으로 왔다.
무기도 한몫을 했다. 화차는 수레 위에 여러 개의 총통이나 화살 발사 틀을 얹어 한꺼번에 쏘는 무기이고, 진천뢰는 심지에 불을 붙여 던지면 얼마 뒤 터지는 폭탄이다. 수차석포는 돌을 날리는 장치로 알려져 있다. 조선군은 이 무기들을 목책 뒤에 두고, 일본군이 일곱 차례 번갈아 밀려올 때마다 버텼다. 관군과 의병, 승병이 한 성 안에서 자리를 나누어 싸웠다는 점도 이 싸움의 특징이다.
숫자로 보는 행주대첩
- 3만여
-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끈 일본군의 수로 흔히 적는 숫자.
- 7
- 일본군이 나뉘어 차례로 공격한 부대의 수.
- 2,300~1만 미만
- 산성 안 조선군의 수. 자료마다 다르다.
- 1천
- 처영이 이끌고 온 승병의 수.
- 2척
- 한강을 거슬러 화살을 싣고 온 배의 수.
- 2일
- 조경이 목책을 세우는 데 걸린 날.
그날까지 잃은 것
행주의 승리는 일본군이 한양에서 물러나는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한양을 되찾은 4월 20일까지, 1592년 5월 초부터 열한 달 가까이 점령된 성안에서 많은 백성이 굶주림 속에 목숨을 잃었다. 행주에서 이긴 날이 더 일렀다면 한양을 되찾는 날도 그만큼 앞당겨졌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앞당기기’로 쓰인 까닭이다.
주요 인물
- 권율
- 전라도 관찰사. 이치와 독산성을 거쳐 행주산성에서 일본 대군을 막았다.
- 조경
- 조방장. 이틀 만에 행주에 목책을 세웠다.
- 처영
- 승장. 승병 1천을 이끌고 행주에 합류했다.
- 변이중
- 화차를 만든 사람. 양천에서 일본군을 견제했다.
- 선거이
- 금천에서 4천 군사로 일본군을 견제했다.
- 이빈
- 경기수사. 화살을 실은 배를 이끌고 한강을 올라왔다고 백과사전은 적는다.
- 우키타 히데이에
- 행주를 공격한 일본군의 총대장.
더 알아 둘 점
행주대첩은 숫자가 자료마다 다르다.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2,300명에서 1만 명 미만까지 여러 설이 있다. 화살 배를 이끌고 온 장수도 백과사전은 경기수사 이빈으로, 다른 자료는 충청수사 정걸로 적는다. 독산성 싸움의 시기도 1592년 12월 이후로 보는 자료와 1593년 7월로 보는 자료가 엇갈린다.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행주치마라는 낱말은 그보다 앞선 문헌에도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이 이야기와 독산성에서 쌀로 말을 씻겨 물이 많은 척했다는 세마대 이야기는 모두 전승이다. 다만 성안의 백성과 부녀자들이 돌을 나르며 싸움을 도왔을 가능성까지 부정할 까닭은 없다. 사료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미리 세운 목책과 화차 같은 무기, 바깥의 견제 부대, 승병, 그리고 한강으로 올라온 화살이 함께 산성을 지켰다는 점이다.
그 뒤와 오늘날
행주에서 진 일본군은 한양에서 더 버틸 힘을 잃었다.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4월 한양을 떠나 남해안으로 내려가 성을 쌓고 머물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해 6월 일본군은 진주성을 다시 공격했고, 교섭이 깨진 1597년에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권율은 도원수로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군 전체를 이끌었고, 1599년 세상을 떠났다.
행주산성은 지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산성 안에는 권율을 모신 사당과 행주대첩을 기리는 비가 있어, 한강을 내려다보며 그날의 싸움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앞당기기’ 이야기다. 나는 전라도 관찰사 권율 본인으로 깨어난다. 나라 군사와 의병(백성이 스스로 모인 군대), 승병(스님 군대)을 한데 묶어 이끈다. 말수가 적고, 한번 정한 진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으니, 준비와 사람과 정보로 그날을 더 일찍 오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조선 선조 25년, 수원 독산성과 고양 행주산성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임진년 여름, 광주 고을 수령(목사) 권율은 전라도로 넘어오는 고개 이치에서 일본 장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사를 막았다. 그 공으로 전라도 관찰사(도를 다스리는 으뜸 벼슬)가 된다.
임진년 섣달, 권율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향해 북으로 올라간다. 한양은 여덟 달째 왜군의 손에 있고, 성안 백성들은 굶주린다.
이듬해 이월 열이틀, 권율의 군사는 행주산성에서 3만 대군을 막아 낸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나는 안다. 더 일찍 올 수도 있다.
셋째 장 · 발단 — 1592년 12월, 수원 독산성
수원 독산성(산 위의 작은 성)에 진을 치자 왜군이 몰려와 성을 둘러쌌다. 산 위에는 물이 귀하고, 한양까지는 아직 멀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사람(인맥), 정보(지식)의 기반을 다진다.
- 날랜 군사를 골라 밤마다 적의 보급 길을 끊는다 힘
왜군이 포위를 풀어 북쪽으로 일찍 올라갈 수 있다. - 근처 고을 의병장들에게 함께하자고 사람을 보낸다 사람
한양 길을 아는 의병들이 힘을 보탠다. - 한양을 빠져나온 백성에게 성안 형편을 묻는다 정보
한양 왜군의 형편을 알고 칠 때를 잡는다.
넷째 장 · 전개 — 1593년 1월, 평양 수복 소식 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군사와 조선군이 평양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왔다. 명군이 한양으로 내려오면, 서쪽에서 함께 칠 자리가 있어야 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재물(물자),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 조방장 조경에게 한강을 건널 곳과 진 칠 언덕을 찾게 한다 정보
한강을 건너 진 칠 좋은 언덕을 일찍 찾는다. - 전라도 군량과 화살을 뱃길로 한강 어귀까지 올린다 재물
어디서 싸워도 먹을 것과 화살이 넉넉하다. - 승장 처영에게 승병을 이끌고 와 달라 청한다 사람
승병 천 명이 와 일손과 군사가 는다.
다섯째 장 · 전개 — 1593년 2월 초, 행주 언덕
독산성에는 깃발만 남기고 군사를 행주로 옮겼다. 왜군이 눈치채기 전에 목책(나무 말뚝 울타리)을 세우고 무기를 갖춰야 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재물(물자),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목책을 안팎 두 겹으로 세우고 흙둑을 쌓는다 힘
적의 총알을 막을 울타리가 단단해진다. - 변이중의 화차와 총통을 언덕 위로 끌어 올린다 재물
한 번에 화살 수십 대를 쏘아 적을 막는다. - 군사와 마을 사람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름
군사와 마을 사람들이 끝까지 버틴다.
여섯째 장 · 그날 — 1593년 2월 초, 행주산성
한양의 왜군이 성을 나와 행주로 오려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이 더 모이기 전에 싸움을 이 언덕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목책 뒤에 화차와 총통을 겹겹이 세우고 적을 맞는다 힘
왜군이 열흘 일찍 무너져 한양에서 물러난다. - 승병과 마을 사람들까지 자리를 나눠 한 몸처럼 세운다 사람
성안 모두가 힘을 합쳐 열흘 일찍 이긴다. - 화살 실은 배를 한강에 미리 띄워 둔다 재물
화살이 떨어지지 않아 왜군이 서둘러 물러난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593년 2월 12일,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끈 3만여 왜군을 막아 냈다. 한양은 4월 20일에야 되찾았고, 그때까지 성안 많은 백성이 굶주림 속에 목숨을 잃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조방장
- 주장을 돕는 장수
- 화차
- 여러 발의 화살이나 총통을 한꺼번에 쏘는 수레
- 진천뢰
- 터지는 쇠공 모양의 폭탄
- 승장
- 승병을 이끄는 스님 장수
- 관찰사
- 도를 다스리는 으뜸 벼슬
- 의병
- 백성이 스스로 모인 군대
- 승병
- 스님 군대
- 독산성
- 산 위의 작은 성
- 목책
- 나무 말뚝 울타리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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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행주 언덕의 목책.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