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 조선 · 막기

2차 진주성 전투 — 촉석루 아래 남강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593년 · 조선 선조 26년
어디서
진주성과 남강
무슨 일
1593년 6월 일본군 수만 명이 진주성을 다시 쳤다(2차 진주성 전투). 지난해 진주성에서 크게 진 것을 갚으려는 싸움이었다.
무엇이 문제였나
아흐레를 버틴 성은 큰비에 성벽이 무너져 함락되었다. 성안의 군사와 백성 6~7만 명이 거의 모두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이야기 속 목표
진주성이 무너지더라도 성안 사람들이 함께 죽지 않고 살아 나가게 만든다

배경: 한 해 전의 승리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것이 1차 진주성 전투, 흔히 진주대첩이라 부르는 싸움이다. 김시민은 이 싸움에서 총탄에 맞아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봄, 한양을 내준 일본군은 경상도 남해안으로 물러나 명나라와 전쟁을 끝내는 화의를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일본군은 진주를 다시 치려 했다. 지난해의 패배를 갚고, 화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뜻이었다. 진주는 곡창인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593년 6월, 일본군이 다시 오다

1593년 6월 초, 일본군은 진주 공격을 준비했다.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 여러 장수의 부대가 함께 움직였다. 그 규모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주성’ 항목이 4만여 명으로 적고, 다른 자료는 그보다 훨씬 크게 적는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군은 화의를 이유로 싸움을 피했다. 도원수 김명원과 전라순찰사 권율은 의령에 이르렀다가 물러났다. 의병장 곽재우는 승산이 없다며 성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전개 — 성에 들어간 사람들, 6월 21일부터의 공방

그래도 성에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고종후, 사천현감 장윤 등과 함께 성에 들어갔고, 김해부사 이종인과 의병장 강희열도 합류했다. 진주목사 서예원은 명군을 접대하느라 상주에 있다가 급히 돌아와 지휘가 매끄럽지 못했다. 성안의 군사는 수천, 주민은 6만에서 7만 명이었다고 전한다.

6월 21일 일본군이 성을 에워쌌고, 22일부터 본격적인 공방이 벌어졌다. 25일 일본군이 동문 밖에 흙언덕을 쌓고 그 위에서 성안으로 총을 쏘자, 성안에서도 맞언덕을 쌓고 조선의 대포인 현자포로 맞섰다. 26일 일본군은 생가죽을 씌운 나무 궤짝 수레인 귀갑차로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고, 27일에는 철갑을 두르고 성을 허물었다.

결말 — 6월 28일과 29일

28일 큰비가 내려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날 성을 지키던 황진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29일, 일본군은 동문 쪽 무너진 성벽으로 밀고 들어왔다. 김천일과 고종후, 최경회는 촉석루에서 북쪽을 향해 절한 뒤 남강에 몸을 던졌다. 이종인과 김준민 등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성안의 군사와 백성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도 손실이 커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1차와 2차, 무엇이 달랐나

같은 성에서 한 해 사이에 승리와 함락이 갈렸다. 1592년 10월의 1차 전투에서 진주성에는 김시민이라는 한 사람의 지휘관이 있었고, 성 밖에서는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일본군의 뒤를 흔들었다. 성안과 성 밖이 함께 싸운 셈이다. 이때 성안의 군사는 3,800명 남짓, 일본군은 2만 명 안팎이었다고 흔히 전한다. 엿새에 걸친 공방 끝에 일본군이 물러갔다.

2차 전투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일본군의 규모는 1차 때보다 훨씬 컸고, 명군과 조선 관군의 주력은 성 밖에서 돕지 않았다. 성안에는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장수들이 있었지만, 지휘를 하나로 묶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큰비가 성벽을 약하게 만들었다. 학자들은 이런 사정이 겹쳐 아흐레 남짓 만에 성이 무너졌다고 본다.

주요 인물

김천일
창의사. 전라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성에 들어가 지휘하다 함락 때 남강에 몸을 던졌다.
최경회
경상우병사. 김천일과 함께 성을 지켰다.
황진
충청병사. 공방의 중심에서 싸우다 6월 28일 전사했다.
고종후
의병장. 한 해 전 금산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로, 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종인
김해부사.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곽재우
의병장. 승산이 없다며 입성을 말렸다고 전한다.
논개
성이 함락된 뒤 일본 장수를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백과사전도 전설로 소개한다.

연표

엇갈리는 숫자들

2차 진주성 전투는 숫자가 크게 갈리는 싸움이다. 일본군의 규모는 4만여 명에서 10만 안팎까지 여러 설이 있고, 30만이라는 기록은 과장으로 본다. 희생자 6만에서 7만이라는 숫자도 성안 주민 수에서 나온 통설이다. 싸움의 기간을 9일로 세기도 하고 11일로 세기도 한다. 김천일이 성에 들어간 날짜도 자료마다 다르다. 분명한 것은 도와줄 군대가 오지 않는 성에서 군사와 백성이 함께 끝까지 버텼다는 사실이다.

논개 이야기는 어떻게 전해졌나

논개의 이야기는 전쟁이 끝나고 한 세대쯤 지나 유몽인이 엮은 『어우야담』에 처음 자세히 나온다. 그 뒤 진주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이어 전했고, 조선 후기에 들어 나라에서도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기렸다. 그가 몸을 던졌다고 전하는 남강의 바위는 의암이라 불리고, 그 곁에 사당인 의기사가 세워졌다. 논개의 출신과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적다. 이 글은 논개를 전설로 소개하되, 그 이야기가 오랫동안 진주의 기억을 붙들어 왔다는 점을 함께 적어 둔다.

오늘날의 진주성

진주성은 지금도 진주 남강 가에 남아 있다. 성 안에는 남강을 내려다보는 촉석루가 있고, 1차와 2차 전투에서 숨진 사람들을 모신 사당 창렬사가 있다. 국립진주박물관도 성 안에 자리 잡고 임진왜란의 역사를 전시한다. 해마다 가을 남강에 등을 띄우는 진주의 유등 행사도, 진주성 싸움 때 강에 등불을 띄워 성 밖과 신호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한 해 전 승리의 성과 이듬해 함락의 성이 같은 곳이라는 점이 이 싸움을 더 무겁게 만든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남강 나루의 뱃사공, 황진 휘하의 젊은 군관, 진주목 관아의 서리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조선 선조 26년, 진주성과 남강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임진년 시월, 진주목사(진주 고을 수령)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듬해 봄 한양을 내준 왜군은 남쪽으로 물러나며, 명나라와 싸움을 끝내자는 이야기(화의)를 하는 사이에도 진주를 다시 치려 한다.

계사년 유월, 왜군 수만이 함안과 의령을 거쳐 진주로 몰려온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군은 화의를 이유로 움직이지 않고, 조선 관군도 의령에서 물러난다. 의병장 곽재우는 도와줄 군대 없는 성에 들어가는 것을 말린다.

의병장 김천일과 장수 최경회, 황진 등이 진주성에 들어간다. 성안에는 군사 수천과 백성 육칠만이 있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593년 6월 초, 왜군이 진주로 모인다는 소문

부산과 김해 쪽에서 왜군이 모인다는 소문이 진주까지 올라왔다. 새 목사 서예원은 명나라 군대를 맞으러 자리를 비웠고, 성안 사람들은 작년 가을의 승리만 이야기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593년 6월 중순, 의병과 관군이 진주성에 들어올 무렵

김천일과 최경회, 황진이 군사를 이끌고 성에 들어왔다. 지휘가 둘로 갈려 군막마다 말이 많고, 피란 보따리를 싼 백성들은 성문 앞에서 머뭇거린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593년 6월 25일~27일, 공방이 한창일 때

왜군은 동문 밖에 흙언덕을 쌓고 그 위에서 성안을 쏘아 댄다. 성안에서도 맞은편에 언덕을 쌓아 현자포(조선의 대포)로 맞선다. 왜군은 생가죽 덮은 나무 수레(귀갑차)로 성벽을 허물 채비도 한다. 하늘에는 비구름이 몰려온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593년 6월 28일~29일, 진주성

큰비에 동문 쪽 성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황진이 쓰러졌다는 말이 성안을 돌고, 남강 쪽 뒷문은 아직 막히지 않았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6월 29일 진주성이 무너졌다. 김천일과 최경회, 고종후는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졌고, 성안의 군사와 백성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창의사
의병을 일으킨 이에게 내린 직함
경상우병사
경상도 서쪽 육군을 지휘하는 장수
귀갑차
생가죽을 씌운 나무 궤짝 수레. 성을 허물 때 썼다
북향재배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함
현자포
조선의 화포 가운데 하나
야담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 적은 글
진주목사
진주 고을 수령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593년, 촉석루 아래 남강.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