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 일제강점기 · 막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관동대지진의 밤
한눈에 보기
- 언제
- 1923년 · 일제강점기
- 어디서
- 요코하마 쓰루미와 도쿄
- 무슨 일
-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에 큰 지진이 났다(관동대지진). 그 밤부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다.
- 무엇이 문제였나
- 소문을 믿은 자경단과 군경의 손에 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동포들이 조사한 숫자만 6,661명에 이른다.
- 이야기 속 목표
- 거짓 소문이 퍼지기 전에 움직여, 조선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안전한 곳에 들인다
배경: 1923년 9월 1일 정오 직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의 큰 지진이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를 덮쳤다. 관동대지진이다. 집이 무너지고, 점심을 준비하던 불이 번져 큰 화재가 밤새 이어졌다. 지진과 화재로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수도권은 폐허가 되었다. 이 무렵 일본에는 일자리를 찾아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와 유학생이 많이 살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4년 남짓 지난 때였고, 일본 사회 한편에는 조선인을 경계하는 시선이 깔려 있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9월 1일 오후와 밤, 소문
지진이 난 그날 오후부터 밤 사이, 요코하마 등지에서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키며 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전기와 전신이 끊기고 신문도 나오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던 사람들 사이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전개 — 9월 2일과 3일, 소문이 공식이 되다
9월 2일 도쿄 일부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9월 3일에는 내무성 경보국장의 이름으로 된 전문이 후나바시 해군 송신소를 거쳐 각지에 전해졌다. 이 전문은 소문을 사실처럼 전했다. 마을마다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자경단을 꾸렸고, 길목마다 검문소가 섰다. 같은 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보호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혔고, 9월 4일과 5일에는 일본인 노동운동가들이 살해된 가메이도 사건도 일어났다.
모두가 소문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요코하마 쓰루미의 경찰 분서장 오카와 쓰네키치는 몰려든 군중을 막아서고 조선인 수백 명을 경찰서에 들여 보호했다. 보호한 사람이 300명이었다고도, 400명이었다고도 전한다.
결말 — 9월 초부터 그 뒤, 남은 숫자
군과 경찰, 각지의 자경단 손에 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도 희생되었다. 9월 5일 무렵부터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는 뜻을 밝히고, 조선인들을 지바현 나라시노의 군 시설 등에 모아 ‘보호’한다는 방침을 폈다. 그러나 혼란은 그 뒤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재판에 넘겨진 것은 자경단 일부였고, 그마저 가벼운 형이나 집행유예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군과 경찰의 책임은 거의 묻히지 않았다.
소문은 어떻게 사람을 해쳤나
이 사건이 무서운 것은 소문 하나가 국가 기관의 공문을 타고 사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검문소에서는 사람을 세워 일본어 낱말을 발음하게 하고, 그 발음으로 조선인인지를 가렸다는 증언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런 방식은 조선인만 겨누지 않았다. 사투리가 심한 일본 지방 출신 사람들이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소문은 처음부터 진실과 상관없었고, 겨눌 대상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 뒤 여러 조사와 연구는 조선인이 불을 지르거나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적이 없다는 데 뜻을 같이한다. 재난 속 공포가 오래된 편견과 만나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기관이 오히려 퍼뜨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 사건은 보여 준다.
추산으로만 남은 숫자
희생자 수는 지금도 추산으로만 남아 있다.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직접 피해를 조사했고, 1923년 12월 5일 상하이의 『독립신문』에 실린 조사 결과는 6,661명이었다. 당시 일본 사법성이 발표한 숫자는 그보다 훨씬 적은 200여 명이었다. 조사한 주체와 방식, 조사가 막힌 정도에 따라 숫자가 이렇게 크게 갈린다. 조선인 조사단은 현장 조사를 하는 동안 여러 제약을 받았다고 전한다. 일본 정부의 공식 조사는 지금까지 없다.
연표
- 9월 1일 11시 58분 관동대지진. 도쿄와 요코하마에 큰불이 번진다.
- 9월 1일 오후~밤 조선인에 대한 거짓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 9월 2일 도쿄 일부에 계엄령. 소문이 더 넓게 퍼진다.
- 9월 3일 내무성 경보국장 명의의 전문이 각지에 전해진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붙잡힌다.
- 9월 4~5일 가메이도 사건.
- 9월 5일 무렵 정부가 조선인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는 뜻을 밝히고, 조선인을 수용소에 모으기 시작한다.
- 1923년 12월 5일 『독립신문』에 재일 조선인 조사단의 집계가 실린다.
- 1973년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세워진다.
- 2023년 지진과 학살 100년.
주요 인물
- 오카와 쓰네키치
- 쓰루미 경찰 분서장. 군중을 막고 조선인 수백 명을 경찰서에 보호했다.
-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지진 직후 붙잡혀 뒤에 대역 사건으로 엮인 독립운동가와 그의 동지.
- 재일 조선인 조사단
- 유학생들이 꾸려 희생자를 조사했다. 그 결과가 『독립신문』에 실렸다.
- 요시노 사쿠조
- 희생자 조사 기록을 남긴 일본 학자.
- 곽상훈
- 희생자 명단을 모으는 일에 힘쓴 사람.
기억하는 사람들
도쿄 스미다구의 요코아미초 공원에는 1973년 일본 시민들의 손으로 세운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있고, 해마다 9월 1일 무렵 이곳에서 추도식이 열린다. 지바와 사이타마, 가나가와 곳곳에도 지역 주민과 재일 동포가 함께 세운 작은 비와 위령의 자리가 있다. 희생자 대부분의 이름은 지금도 알려지지 않았다. 몇몇 지역에서는 주민과 연구자들이 옛 기록과 증언을 모아, 그 땅에서 숨진 사람들의 이름과 고향을 하나씩 찾아내는 일을 이어 가고 있다. 2023년, 지진 100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와 연구 발표가 이어졌다.
더 알아 둘 점
이 사건은 관동대학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소문은 재난 속 공포에서 시작되었지만, 국가 기관의 전문이 그것을 사실처럼 퍼뜨리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소문이 공식이 되기 전의 하루 남짓이 많은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이 사건을 일본 사람 전체의 일로 뭉뚱그려 말하기는 어렵다. 군중 앞을 막아선 오카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 희생자를 조사해 기록한 일본 학자도 있었으며, 지금도 추도비 앞을 지키는 일본 시민들이 있다. 이 글은 희생의 장면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숫자조차 추산으로만 남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키고 기억하려 한 사람들을 함께 적어 두려 한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요코하마 공사장의 조선인 반장, 혼고 하숙집의 조선인 고학생, 쓰루미 분서의 젊은 일본인 순사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일제강점기, 요코하마 쓰루미와 도쿄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923년 9월 1일 정오 직전, 큰 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쳤다. 집이 무너지고 불길이 밤새 번진다.
그날 밤부터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돈다. 이틀 뒤에는 내무성(일본의 경찰·지방 행정 부처)의 급한 공문(전문)이 그 소문을 사실처럼 각지에 전하고, 곳곳에 자경단(동네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만든 경비 모임)이 선다.
쓰루미 경찰 분서장(작은 경찰서의 우두머리) 오카와 쓰네키치처럼 문을 열어 사람들을 지킨 이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그 수는 지금도 추산으로만 남아 있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23년 8월, 요코하마 공사장과 하숙촌
공사장과 하숙촌에는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모여 산다. 고향 이야기는 해도, 누가 어디 사는지 적어 둔 사람은 없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동포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명부로 적어 둔다 정보
그날 밤 누구를 찾아 데려가야 할지 안다. - 하숙집 주인과 이웃 교회 목사와 믿음을 쌓는다 사람
위급할 때 문을 열어 줄 일본인 이웃이 생긴다. - 쌀과 물통, 담요를 쌓아 둘 창고를 빌린다 재물
난리 통에도 나눌 먹을 것과 담요가 있다.
넷째 장 · 전개 — 1923년 9월 1일 정오, 지진 직후
땅이 흔들리고 지붕이 내려앉았다. 거리마다 불길이 오르고, 사람들은 공원과 강가로 몰려간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 동네 소방조 조장과 함께 무너진 집에서 사람을 꺼낸다 사람
일본인 이웃이 나를 믿고 감싸 줄 수 있다. - 피난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르며 이웃에게 얼굴을 알린다 이름
동네 사람들이 나를 좋은 청년으로 기억한다. - 쓰루미 분서까지 가는 안전한 골목길을 확인한다 힘
사람들을 경찰서까지 안전하게 데려갈 길을 안다.
다섯째 장 · 전개 — 1923년 9월 1일 저녁, 피난민이 모인 공원
해가 지자 공원 어귀에서 낯선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이름(평판·여론),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거슬러 묻고 다닌다 정보
소문이 거짓이라는 증거를 손에 쥔다. - 나를 아는 이웃들에게 소문이 틀렸다고 말한다 이름
나를 아는 이웃들부터 소문을 믿지 않게 된다. - 창고의 쌀과 담요를 피난민 모두에게 나눈다 재물
조선인을 향한 의심이 고마움으로 바뀐다.
여섯째 장 · 그날 — 1923년 9월 1일 밤부터 2일 새벽, 쓰루미
소문이 공문이 되어 돌기 전, 남은 시간은 하룻밤뿐이다. 명부 속 이름들은 아직 흩어져 있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명부의 동포들을 쓰루미 분서와 교회로 이끈다 사람
경찰서와 교회 문 안에서 동포들이 살아남는다. - 소문이 거짓이라는 증거를 이웃과 기자에게 건넨다 정보
거짓이 드러나 그 동네 자경단이 흩어진다. - 지킨 사람과 찾지 못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남긴다 이름
그 밤의 일이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는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계엄 당국과 경찰, 각지 자경단의 손에 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수는 당시 조사로 6,661명 등이 추산될 뿐, 공식 조사는 지금도 없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유언비어
- 근거 없이 퍼진 소문
- 계엄령
- 전쟁이나 큰 재난 때 군대가 치안을 맡게 하는 명령
- 경보국장
- 일본 내무성에서 경찰 업무를 맡은 국의 책임자
- 보호검속
-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붙잡아 가둠
- 자경단
-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꾸린 경비 조직
- 추도
-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함
- 내무성
- 일본의 경찰·지방 행정 부처
- 분서장
- 작은 경찰서의 우두머리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의 밤.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