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경신참변
1920년 · 일제강점기 · 막기
경신참변 — 청산리 뒤의 마을들
한눈에 보기
- 언제
- 1920년 · 일제강점기
- 어디서
- 북간도 봉오동과 청산리
- 무슨 일
- 1920년 독립군이 봉오동·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이기고 북쪽으로 떠나자, 일본군이 간도 한인 마을들로 보복하러 들어왔다(경신참변).
- 무엇이 문제였나
- 독립군을 도왔다고 몰린 마을들이 불탔고,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이야기 속 목표
- 독립군이 떠난 뒤 일본군의 보복을 당할 간도 한인 마을 사람들을 살린다
배경: 두 번의 승리
1920년 6월 7일, 홍범도와 최진동, 안무가 이끄는 연합 부대 대한북로독군부가 국경을 넘어 쫓아온 일본군을 간도 봉오동 골짜기로 끌어들여 크게 이겼다. 봉오동 전투다. 넉 달 뒤인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는 김좌진과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부대 등이 청산리 일대의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등에서 여러 차례 싸워 이겼다. 청산리 대첩이다.
그러나 이 두 승리는 일본이 간도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간도의 한인 마을은 독립군에게 밥과 잠자리, 길 안내와 소식, 그리고 젊은이들을 내주는 곳이었다. 일본은 독립군만이 아니라, 독립군을 먹이고 숨겨 주는 한인 마을 자체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920년 여름, 초토 계획
봉오동 전투 뒤 일본은 간도 지역의 이른바 ‘불령선인’을 쓸어 없앤다는 계획을 세웠다. 불령선인은 일제가 말을 듣지 않는 조선인을 낮춰 부르던 말이다. 이 계획을 실행하려면 중국 땅인 간도에 군대를 보낼 구실이 필요했다. 일본은 먼저 중국 당국을 압박해 독립군을 단속하게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개 — 10월 2일, 훈춘 사건과 출병
10월 2일로 알려진 날, 마적들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다. 이것이 훈춘 사건이다. 이 습격을 일본 측이 뒤에서 꾸몄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있던 부대와 시베리아에 나가 있던 부대 일부까지 움직여 대군을 간도에 보냈다.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이 군대를 맞아 싸워 이겼고, 싸움이 끝난 뒤 밀산 방면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결말 — 1920년 10월 하순부터 1921년 봄까지
독립군이 떠난 뒤 남겨진 것은 한인 마을들이었다. 일본군 토벌대는 이 마을들을 독립군의 근거지로 몰아 불태웠다. 집과 학교와 교회가 불탔고, 곡식이 사라졌다. 10월 하순부터 이듬해 봄까지 간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집을 잃은 채 겨울을 나야 했다. 이 글에서는 그 장면을 자세히 그리지 않는다.
연표로 보는 1920년의 간도
- 5월 말 세 독립군 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로 연합한다.
-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이긴다.
- 여름 일본이 간도의 독립운동 세력을 없앨 계획을 세운다.
- 10월 2일 훈춘의 일본 영사관이 습격당한다. 일본이 간도 출병의 구실로 삼는다.
- 10월 21~26일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이 여러 차례 싸워 이긴다.
- 10월 하순~이듬해 봄 일본군 토벌대가 간도의 한인 마을들을 불태운다.
- 12월 무렵 북쪽으로 옮긴 독립군 부대들이 밀산에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꾸린다.
기록과 증언
당시 간도에 있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불탄 마을과 희생자를 직접 보고 기록을 남겼다. 용정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선교사 마틴은 가까운 마을을 찾아가 피해를 살피고 그 모습을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선교사들의 보고는 외국 교회와 언론에 전해졌고, 이 목격 기록은 경신참변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도 간도의 소식을 모아 기관지 『독립신문』에 실었다. 지역마다 목숨을 잃은 사람과 불탄 집의 수를 적은 보도였다. 희생자는 수천 명으로 추산되지만, 집계는 자료마다 다르다. 피해 지역이 넓고 깊은 산골까지 걸쳐 있었으며, 일본 측 기록은 이 일을 독립군 토벌로 적었기 때문이다.
왜 함께 기억해야 하나
무장 독립운동의 역사는 흔히 이긴 싸움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봉오동과 청산리라는 이름은 교과서에 나오지만, 그 뒤에 불탄 마을들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떼어 놓을 수 없다. 독립군이 국경 너머에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간도에 이미 수십 년에 걸쳐 일군 한인 마을과 학교와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을들이 독립군을 길러 냈고, 싸움이 끝난 뒤 그 대가를 치렀다.
경신참변은 군대가 무장한 적이 아니라 그 적을 돕는다고 여긴 민간인을 겨누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준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을 미워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토벌이라는 이름 아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희생자들의 이름 대부분은 지금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
주요 인물
- 홍범도
-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싸웠다.
- 최진동과 최운산
- 봉오동 전투를 이끈 군무도독부의 형제. 최운산은 군자금과 병참을 맡았다.
- 안무
- 국민회군을 이끌고 대한북로독군부에 합류했다.
- 김좌진과 이범석
-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과 연성대장. 청산리 싸움을 이끌었다.
- 서일
- 북로군정서의 총재. 뒤에 대한독립군단의 총재가 되었다.
- 마틴
- 간도의 캐나다 선교사. 참변의 현장을 기록했다.
그 뒤에 일어난 일
경신참변의 소식이 바깥에 알려지자 국제 사회의 눈길도 쏠렸다. 선교사들의 보고는 일본의 간도 출병이 독립군 토벌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료가 되었다. 일본군은 이듬해 봄 무렵까지 간도에서 차례로 물러났다.
간도를 떠난 독립군은 북쪽 밀산에서 다시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꾸렸고, 이듬해 러시아 땅 자유시로 옮겨 갔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에서는 독립군 사이의 주도권 다툼과 러시아 적군의 개입이 얽혀 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간도의 한인 마을들은 불탄 자리에서 다시 집을 짓고 학교를 열었다. 무장 독립운동은 그 뒤 남만주와 북만주에서 새로 조직을 꾸리며 이어졌다.
더 알아 둘 점
경신참변은 승리의 뒤편에 있는 사건이라 덜 알려져 있다. 간도참변이라고도 부른다. 봉오동과 청산리는 무장 독립 전쟁의 빛나는 승리였지만, 그 승리를 떠받친 것은 독립군에게 밥과 잠자리와 길을 내준 간도의 동포들이었다. 독립군이 떠난 뒤 그 마을들이 보복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봉오동 전투의 일본군 피해도 157명 전사라는 기록과 그보다 훨씬 적게 적은 일본 측 기록이 엇갈리고, 경신참변의 희생자 수도 집계마다 다르다. 숫자가 갈리는 만큼,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는 이 사건을 독립군이 떠나고 토벌대가 오기 전의 며칠, 마을 사람들을 피하게 할 수 있었던 시간으로 그린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최씨 집안 창고를 맡은 머슴, 명동촌 교회 학교의 교사, 사관연성소의 취사병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일제강점기, 북간도 봉오동과 청산리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간도(두만강 북쪽, 한인이 많이 살던 만주 땅)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크게 이겼다.
10월에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독립군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청산리 골짜기에서 잇달아 이긴다. 독립군은 그 뒤 북쪽으로 길을 떠난다.
남겨진 마을들에 일본군 토벌대(독립군을 쫓아 없애려는 부대)가 들어오고, 그해 겨울 간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20년 5월, 봉오동
홍범도와 최진동 등이 손잡고 대한북로독군부(여러 독립군을 합친 부대)를 만들었다. 골짜기 마을은 군량과 사람을 대느라 분주하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재물(물자),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 봉오동 골짜기 어귀와 능선, 물길을 걸어 지도로 만든다 정보
사람들이 숨을 바위와 물 마실 곳을 미리 안다. - 최운산 집안 곡식과 소금 창고 장부를 맡는다 재물
어느 집에 곡식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된다. - 비상시 사람과 짐을 숨길 마른 동굴을 찾는다 힘
급할 때 사람과 곡식을 숨길 곳이 생긴다.
넷째 장 · 전개 — 1920년 10월 초, 훈춘 사건 뒤
훈춘의 일본 영사관(외교 관청)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왔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대군을 간도에 들여보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산마을마다 빨래 널기 같은 경보 신호를 약속한다 사람
말없이도 열두 마을에 피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 용정 시장에서 일본 영사관과 군 이동 소문을 모은다 정보
토벌대가 어느 길로 들어올지 미리 안다. - 교회와 서당 어른들이 믿는 젊은이가 된다 이름
내가 피하자고 하면 마을이 따라 준다.
다섯째 장 · 전개 — 1920년 10월 하순, 청산리
백운평과 어랑촌에서 독립군이 이겼다는 소식이 산을 넘어왔다. 독립군은 곧 북쪽 밀산 쪽으로 떠난다고 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재물(물자),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 집집마다 어느 산막으로 갈지 피난 짝을 정한다 사람
노인과 아이까지 갈 곳이 정해져 헤매지 않는다. - 마을 곡식을 산속 비밀 창고로 옮길 소달구지를 빌린다 재물
겨울을 날 곡식을 토벌대 손이 안 닿는 곳에 둔다. - 산막으로 가는 길 셋을 걸어 보고 나무로 표시한다 힘
밤에도 산막까지 길을 잃지 않는다.
여섯째 장 · 그날 — 1920년 10월 말, 독립군이 떠난 다음 날
마지막 독립군 대열이 북쪽 능선을 넘어갔다. 토벌대가 마을에 닿기까지 남은 날은 사흘뿐이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빨래 신호를 올려 마을 사람들을 산막으로 이끈다 사람
토벌대가 왔을 때 마을이 비어 사람들이 산다. - 명동촌 선교사에게 토벌 소식을 바깥에 알리게 한다 정보
바깥 신문에 알려져 토벌이 일찍 끝난다. - 산속 창고의 곡식을 피난한 사람들 몫으로 나눈다 재물
피난한 사람들이 굶지 않고 겨울을 넘긴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독립군이 떠난 뒤 일본군은 간도의 한인 마을들을 독립군 근거지로 몰아 불태웠고, 이듬해 봄까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경신참변
- 1920년 경신년에 간도에서 일어난 한인 학살
- 불령선인
- 일제가 말을 듣지 않는 조선인을 낮춰 부르던 말
- 토벌
- 무력으로 쳐 없앰
- 출병
- 군대를 내보냄
- 마적
- 말을 타고 떼 지어 다니던 도적
- 간도
- 두만강 북쪽, 한인이 많이 살던 만주 땅
- 북로군정서
- 독립군 부대
- 토벌대
- 독립군을 쫓아 없애려는 부대
- 대한북로독군부
- 여러 독립군을 합친 부대
- 영사관
- 외교 관청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1920년, 청산리 뒤의 마을들.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