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105인 사건

1911년 · 일제강점기 · 막기

105인 사건 — 105인 사건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911년 · 일제강점기, 무단통치기
어디서
평안북도 선천과 경성
무슨 일
1911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총독 암살 모의를 꾸며 내, 신민회 등 독립운동가 600여 명을 붙잡았다(105인 사건).
무엇이 문제였나
고문으로 받아 낸 거짓 자백으로 105명이 1심에서 유죄를 받았고, 비밀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가 사실상 무너졌다.
이야기 속 목표
총독부가 꾸며 낸 "총독 암살 모의"에서 신민회 사람들을 지켜 낸다

배경: 무단통치와 신민회

1910년 나라를 빼앗은 뒤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앞세워 조선을 다스렸다. 이 시기를 무단통치기라 부른다. 헌병이 경찰 일을 겸했고, 집회와 결사는 거의 막혔다. 그 무렵 국내에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가 있었다. 신민회는 안창호, 양기탁 등이 1907년 무렵 만든 단체로, 학교를 세우고 산업을 일으키며 나라 밖에 독립군 기지를 마련하려 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비밀 결사였기 때문에, 회원 명단이나 조직의 모습은 지금도 일부만 알려져 있다.

신민회의 힘은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곧 서북 지방에 모여 있었다. 이 지역은 기독교가 일찍 퍼진 곳이었고,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선천의 신성학교와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가 그 중심이었다. 총독부가 보기에 서북의 교회와 학교는 언제든 저항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910년 12월, 안명근 체포와 선천역의 악수

1910년 12월, 독립운동 자금인 군자금을 모으던 안명근이 평양역 부근에서 붙잡혔다. 이듬해 1월에는 김구와 김홍량 등 황해도 인사들이 잡혀간 안악 사건이 이어졌다. 그보다 앞선 1910년 12월 28일, 데라우치 총독이 서북 지방을 돌다 선천역에 내렸을 때 신성학교 교장인 미국인 선교사 매큔이 총독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 평범한 악수는 훗날 수사 기록에 암살 신호로 적혔다.

전개 — 1911년 가을, 600여 명의 검거

총독부는 안명근의 체포를 데라우치 총독을 노린 거대한 암살 모의로 부풀렸다. 1911년 9월과 10월, 선천 신성학교의 교사와 학생, 평양 대성학교 관계자, 신민회 간부들이 대거 붙잡혔다. 전국에서 6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 본부인 경무총감부에 오래 갇혀 모진 신문을 받았고, 그렇게 받아 낸 자백이 조서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이 사실을 미국 장로교 본부와 언론에 알렸다.

결말 — 1912년과 1913년, 두 번의 재판

122명이 기소되었고,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시작되었다. 피고들은 법정에서 한목소리로 고문 때문에 거짓 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9월 28일 1심에서 105명이 유죄를 받았다. 사건의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선교사들과 해외 여론은 사건이 꾸며졌다고 지적했다. 1913년 3월 경성복심법원의 항소심에서 99명이 무죄로 풀려났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6명만 유죄를 받았다. 이 6명의 형은 그해 상급심을 거쳐 확정되었고, 이들도 1915년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 사이 신민회는 사실상 무너졌고, 신문 과정에서 김근형 등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연표로 보는 105인 사건

사건은 어떻게 꾸며졌나

총독부가 내세운 이야기는 이랬다. 신민회 회원들이 데라우치가 서북을 순시하는 길목마다 사람을 숨겨 두었고, 선천역에서는 매큔의 악수를 신호로 총을 쏘려 했으나 경비가 삼엄해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받치는 것은 무기도, 문서도 아닌 자백뿐이었다. 법정에서 피고들은 그날 그 시각 다른 곳에 있었다고 말했고,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사람들이 한 모의에 묶여 있었다. 조서의 내용이 서로 어긋나는 대목도 많았다.

2심에서 대부분이 무죄를 받은 것도 그래서였다. 법원은 대부분의 피고에 대해 자백 말고는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유죄가 남은 6명은 하나같이 신민회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결국 이 재판은 없는 모의를 처벌한 것이 아니라, 신민회라는 조직을 무너뜨리는 데 쓰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주요 인물

안명근
군자금을 모으다 붙잡힌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사촌 동생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양기탁
신민회의 핵심 인물. 끝까지 유죄를 받은 6명 가운데 하나다.
이승훈
오산학교를 세운 교육자. 유죄가 확정되었다가 1915년 풀려났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이 되었다.
윤치호
대성학교 교장. 1심에서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훗날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는다.
김구
안악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선총독. 사건은 그를 노린 암살 모의로 꾸며졌다.
조지 매큔
선천 신성학교 교장인 미국인 선교사. 그의 악수가 암살 신호로 날조되었다.

자주 헷갈리는 점

첫째, 105인은 검거된 사람의 수가 아니다. 붙잡힌 사람은 600여 명이고, 기소된 사람은 122명이며, 105명은 1심에서 유죄를 받은 사람의 수다. 끝까지 유죄가 남은 사람은 6명뿐이었다. 검거 인원을 700여 명으로, 기소 인원을 123명으로 적는 자료도 있다.

둘째,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은 서로 이어져 있지만 같은 사건이 아니다. 안악 사건은 안명근의 군자금 모집과 관련해 황해도 인사들을 붙잡은 일이고, 105인 사건은 그 뒤 평안도를 중심으로 신민회 전체를 겨눈 일이다. 당시 일제가 붙인 정식 이름은 ‘사내총독 모살미수 사건’이었다. 사내는 데라우치의 한자 이름을 우리식으로 읽은 것이다. 항소심 이후의 법원 표기와 날짜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뒤에 일어난 일

105인 사건은 증거 없이 고문으로 만든 자백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법정에 세운 조작 사건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서북 지방의 민족 운동 세력을 크게 꺾었다. 그러나 운동이 끝나지는 않았다. 신민회 사람들이 닦아 둔 서간도의 독립군 기지와 신흥강습소는 그 뒤로도 이어져 독립군을 길러 냈다. 감옥에서 나온 이승훈은 몇 해 뒤 3·1운동에 함께했고, 서북의 교회와 학교는 다시 만세의 길목이 되었다. 무단통치의 가장 거친 얼굴을 보여 준 이 사건은, 동시에 그 통치가 사람들의 마음까지 꺾지는 못했다는 것도 보여 준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선천 신성학교의 삼학년 학생, 평양 대성학교의 서무 직원, 경성지방법원의 조선인 통역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일제강점기, 무단통치기, 평안북도 선천과 경성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910년 12월, 독립운동 자금(군자금)을 모으던 안명근이 평양 부근에서 붙잡혔다. 총독부(일본이 조선을 다스리던 관청)는 이 일을 데라우치 총독을 노린 거대한 모의로 부풀리기 시작한다.

12월 28일 데라우치가 서북 지방을 돌다 선천역에 내렸을 때, 신성학교의 미국인 선교사 교장 매큔은 총독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 악수는 훗날 조서(경찰의 수사 기록)에 "암살 신호"로 적힌다.

이듬해 가을이면 신민회(비밀 독립운동 단체) 사람들을 비롯해 선천과 평양에서 육백여 명이 끌려가고, 백다섯 명이 1심에서 유죄를 받는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10년 12월 28일, 선천역

데라우치 총독의 기차가 선천역에 닿았다. 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고, 매큔 교장이 총독에게 손을 내민다. 이 하루가 일 년 뒤 죄목이 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911년 1월, 안악 사건 소식이 들려올 때

황해도 안악에서 김구와 김홍량 등이 줄줄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왔다. 경무총감부(일본 경찰 본부)의 그물은 서쪽에서 북쪽으로 조여 오고 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이름(평판·여론), 정보(지식),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911년 여름, 선천

형사들이 신성학교 근처 여관에 머물며 학생들 이름을 묻고 다닌다. 매큔 교장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끼지만 아직 증거가 없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911년 9월, 선천 신성학교 검거 전날 밤

내일 새벽 경찰이 신성학교로 들이닥친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교사와 학생들이 한꺼번에 끌려간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912년 9월 1심에서 105명이 유죄를 받았다. 이듬해 항소심에서 99명이 무죄로 풀려났지만, 신민회는 사실상 무너졌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무단통치
헌병과 경찰의 힘으로 다스린 1910년대 일제의 통치 방식
기소
검사가 법원에 재판을 청구함
복심법원
지금의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2심 법원
특사
특별히 죄를 용서해 풀어 줌
조서
수사 기관이 신문한 내용을 적은 문서
총독부
일본이 조선을 다스리던 관청
신민회
비밀 독립운동 단체
경무총감부
일본 경찰 본부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911년, 105인 사건.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