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청산리 대첩
1920년 · 일제강점기 · 앞당기기
청산리 대첩 — 백운평으로 가는 길
한눈에 보기
- 언제
- 1920년 · 일제강점기
- 어디서
- 북간도 왕청현과 화룡현 청산리
- 무슨 일
-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가 만주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엿새 동안 싸워 이겼다(청산리 대첩).
- 왜 앞당기나
- 싸움은 10월 21일에야 시작됐다. 그 무렵 간도에 들어온 일본군이 한인 마을을 불태웠으니, 빨리 이길수록 마을을 지킨다.
- 이야기 속 목표
- 일본군 토벌대가 한인 마을로 흩어지기 전에 청산리 싸움의 승리를 앞당긴다
배경: 숲속의 사관학교
1919년, 서일과 김좌진 등은 만주 왕청현의 깊은 숲에 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를 세웠다. 서일이 총재를, 김좌진이 총사령관을 맡았다. 서일은 대종교를 이끌던 사람이었고, 부대의 많은 사람이 대종교와 이어져 있었다. 이들은 사관연성소라는 독립군 장교 학교를 열어 젊은이들을 길러 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졸업생은 298명이었다. 연성대장은 이범석이었다.
무기를 마련하는 일도 중요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러시아 땅에 있던 체코 군단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독립군은 이들에게서 소총과 기관총, 탄약을 사들여 무장했다. 그 시점과 경로는 아직 확인이 더 필요하지만, 이 무기가 몇 달 뒤 청산리에서 큰 힘이 되었다고 정리된다.
싸움에 이르기까지
발단 — 1920년 9월, 근거지를 떠나다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진 일본은 간도의 독립군을 없애려 했다. 중국 관헌이 독립군에게 근거지를 옮기라고 요구하자, 북로군정서는 9월 17일 근거지를 떠났다. 그리고 10월 10일 무렵 화룡현 청산리에 닿아 홍범도 부대와 앞일을 의논했다. 독립군들은 백두산 쪽 깊은 산으로 옮겨 오래 버틸 근거지를 새로 만들려 했다.
전개 — 10월, 훈춘 사건과 일본군의 출병
10월 초, 훈춘의 일본 영사관이 습격당하는 훈춘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대군을 간도에 들여보냈다. 10월 19일 독립군 지도부는 회의를 열어 일단 싸움을 피하자는 쪽을 택했다. 수와 무기에서 크게 밀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이 다가오자 숨어서 기다렸다가 치는 매복전으로 방향을 바꿨다.
엿새의 싸움
- 10월 21일 백운평. 김좌진이 이끄는 제1제대와 이범석이 이끄는 제2제대가 골짜기 양쪽에 숨어 있다가 쫓아온 야스카와의 추격대를 깨뜨린다. 같은 날 홍범도 부대는 완루구에서 일본군과 싸운다.
- 10월 22일 새벽 천수평. 북로군정서가 마을에 머물던 일본군 기병중대를 기습해 깨뜨린다.
- 10월 22일 오전부터 어랑촌. 몰려온 일본군 본대의 포위를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가 함께 막아 낸다. 엿새 가운데 가장 큰 싸움으로 꼽힌다.
- 10월 23~25일 맹개골, 만기구, 쉬구, 천보산 일대. 독립군이 자리를 옮기며 작은 접전을 이어 간다.
- 10월 25일 밤~26일 새벽 고동하. 마지막 싸움을 치른 뒤 독립군이 안도현 쪽으로 옮겨 간다.
날짜와 장소의 이름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힌다. 백과사전은 일본군 1,200여 명이 죽고 독립군은 100여 명이 전사했다고 적는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독립군은 수에서 크게 밀렸다. 이긴 까닭으로는 먼저 싸움터를 고른 점이 꼽힌다. 백운평처럼 길이 좁고 양쪽이 높은 골짜기에서는 쫓아오는 쪽이 앞을 내다보기 어렵고, 숨어 기다리는 쪽이 유리했다. 독립군은 산길을 잘 아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사관연성소에서 길러 낸 장교와 병사들은 짧은 시간에 자리를 옮기고 다시 싸울 수 있을 만큼 훈련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도 컸다. 어랑촌 싸움 때 마을 부녀자들이 산 위의 독립군에게 밥을 지어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렇게 독립군을 도운 마을들이 싸움이 끝난 뒤 일본군의 보복을 받았다는 점은 함께 기억해야 할 대목이다.
또 하나는 서로 다른 부대의 협력이다.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는 뿌리도 지휘 계통도 달랐다. 그런데도 어랑촌에서는 같은 산줄기에 자리 잡고 함께 일본군의 포위를 막아 냈다. 하나의 사령부 아래 묶여 있지 않던 부대들이 위기의 순간에 힘을 합친 것이 엿새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고 평가된다. 엿새 내내 독립군은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채 산길을 옮겨 다녔다고 회고된다. 승리는 지형과 무기만이 아니라 그런 버팀에서도 나왔다.
주요 인물
- 김좌진
-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백운평에서 제1제대를 이끌었다.
- 서일
- 북로군정서 총재. 부대를 세운 사람이다.
- 이범석
- 사관연성소 연성대장. 백운평에서 제2제대를 이끌었다.
- 나중소
- 북로군정서 참모부장.
- 홍범도
-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완루구와 어랑촌에서 함께 싸웠다.
- 아즈마 마사히코
- 청산리 일대로 온 일본군 지대의 지휘관.
그날까지 잃은 것
청산리의 싸움은 10월 21일에야 시작되었다. 그 무렵 간도에 들어온 일본군은 한인 마을들을 독립군의 근거지로 몰아 불태웠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을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는 승리가 더 일렀다면 일본군이 마을로 흩어지기 전에 발이 묶였을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이 사건을 ‘앞당기기’로 그린다. 이 대목은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의 가설이다.
그 뒤에 일어난 일
싸움을 마친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북쪽으로 옮겨 갔다. 그해 겨울 여러 부대가 러시아와 맞닿은 밀산에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꾸렸고, 서일이 총재를 맡았다. 이들은 이듬해 러시아 땅으로 건너갔지만, 1921년 6월 자유시에서 독립군끼리의 주도권 다툼과 러시아 적군의 개입이 얽힌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큰 피해를 입었다. 김좌진 등 일부는 만주로 돌아와 다시 부대를 꾸렸다. 청산리의 승리는 무장 독립운동의 정점이었지만, 그 뒤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더 알아 둘 점
청산리 대첩의 일본군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 독립군 쪽 보고와 일본 쪽 기록 사이의 차이가 크고, 이 글은 백과사전의 숫자를 따랐다. 훈춘 사건은 마적이 영사관을 습격한 일인데, 일본이 이를 뒤에서 꾸몄다는 주장이 있다. 사관연성소 졸업 날짜도 아직 확인이 더 필요하다. 청산리 대첩이라는 이름은 백운평부터 고동하까지 여러 싸움을 하나로 묶어 부르는 것이어서, 한 번의 전투로 오해하기 쉽다.
청산리 대첩은 봉오동 전투와 함께 무장 독립 전쟁의 가장 큰 승리로 기억된다. 그러나 승리 뒤에 남겨진 마을들의 비극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독립군은 북쪽으로 길을 떠나 밀산에서 다시 모였고, 간도의 한인 마을들은 그해 겨울 큰 고통을 겪었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앞당기기’ 이야기다. 나는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본인으로 깨어난다. 젊은 날 집안의 노비 문서를 불살라 사람들을 풀어 준 일로 이름이 났다. 말을 타면 누구보다 앞서고, 군기는 엄하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으니, 준비와 사람과 정보로 그날을 더 일찍 오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일제강점기, 북간도 왕청현과 화룡현 청산리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919년, 서일과 김좌진은 만주 왕청현 깊은 숲에 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를 세웠다. 사관연성소(독립군 장교 학교)를 열어 젊은이들을 길러 낸다.
1920년 10월, 일본은 훈춘 사건(훈춘의 일본 영사관이 습격당한 일)을 구실로 대군을 간도(한인이 많이 살던 만주 땅)에 들여보낸다. 북로군정서는 근거지를 떠나 화룡현 청산리 골짜기로 들어간다.
10월 21일 아침, 백운평 골짜기에서 첫 총성이 울리고 엿새 동안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나는 안다. 더 일찍 올 수도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20년 여름, 왕청현 십리평 숲
숲속 사관연성소에서 젊은이들이 훈련한다. 총은 사람 수에 모자라고, 가을이 되어야 졸업생이 나온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재물(물자), 힘(무력·조직),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 블라디보스토크로 사람을 보내 체코 군단의 총을 사 온다 재물
대원마다 총 한 자루씩 쥐고 싸운다. - 사관연성소 훈련을 다그쳐 졸업을 서두른다 힘
장교 수백 명이 한 달 일찍 부대에 든다. - 홍범도 부대에 사람을 보내 함께 움직일 길을 묻는다 사람
두 부대가 가까이 머물며 함께 싸울 수 있다.
넷째 장 · 전개 — 1920년 9월, 근거지를 떠나며
중국 관헌(관청 사람)이 근거지를 옮기라고 거듭 요구했다. 대원들과 짐을 이끌고 백두산 쪽으로 먼 길을 떠나야 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재물(물자),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정찰대를 앞서 보내 청산리 골짜기를 살핀다 정보
적을 끌어들일 좁은 골짜기를 미리 안다. - 행군길 마을들에서 군량과 짚신을 미리 사 둔다 재물
짐이 가벼워져 대열이 더 빨리 걷는다. - 행군길 마을마다 들러 독립군이 왔다고 알린다 이름
마을 사람들이 길과 소식을 알려 준다.
다섯째 장 · 전개 — 1920년 10월 초, 청산리
일본군이 간도로 들어온다는 소식이 닿았다. 대원들 사이에는 싸우자는 말과 피하자는 말이 함께 오간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 나무꾼과 소 장수에게 일본군 대열의 길을 알려 달라 한다 정보
일본군이 언제 어디로 올지 가늠한다. - 백운평 골짜기 양쪽 비탈에 매복할 자리를 정한다 힘
골짜기 양쪽에서 적을 마주 쏠 수 있다. - 피하자는 대원들과 밤새 이야기해 뜻을 모은다 사람
피하지 않고 싸울 자리를 우리가 고른다.
여섯째 장 · 그날 — 1920년 10월 중순, 청산리 백운평
일본군 추격대가 근처 마을들로 들어오고 있다. 그들이 골짜기 마을마다 흩어지기 전에, 백운평으로 먼저 불러들여야 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두 제대를 골짜기 양쪽에 숨기고 추격대를 기다린다 힘
엿새 일찍 싸움이 열려 일본군 발이 묶인다. - 행군 흔적을 일부러 남겨 추격대를 골짜기로 이끈다 정보
추격대를 일찍 끌어들여 산 아래 마을이 숨 돌린다. - 홍범도 부대와 날을 맞춰 두 골짜기에서 함께 싸운다 사람
두 부대가 함께 일찍 이겨 마을이 덜 불탄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는 백운평·완루구·천수평·어랑촌 등에서 10여 차례 싸워 이겼다. 그 무렵 간도에 들어온 일본군은 한인 마을들을 불태웠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북로군정서
- 서일과 김좌진이 북간도에 세운 독립군 부대
- 체코 군단
- 1차 세계대전 뒤 러시아를 거쳐 귀국하던 체코 군대
- 피전론
- 싸움을 피하자는 주장
- 화룡현
- 중국 길림성 동쪽의 고을. 청산리가 있다
- 제대
- 부대를 몇 갈래로 나눈 단위
- 사관연성소
- 독립군 장교 학교
- 간도
- 한인이 많이 살던 만주 땅
- 관헌
- 관청 사람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청산리대첩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청산리 대첩 1920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청산리 전투에 대한 대한 군정서 보고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국외의 독립 전쟁
1920년, 백운평으로 가는 길.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