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아우내 만세운동과 유관순

1919년 · 일제강점기 · 막기

아우내 만세운동과 유관순 — 아우내 장날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919년 · 일제강점기
어디서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와 지령리
무슨 일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과 마을 사람 3천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3·1운동 아우내 만세).
무엇이 문제였나
헌병의 발포로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붙잡힌 유관순은 이듬해 서대문감옥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야기 속 목표
장날 모인 사람들과 유관순의 부모를 지키고, 유관순이 살아서 집에 돌아오게 한다

배경: 서울에서 고향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퍼졌다. 처음에는 서울과 평양 같은 도시와 철도가 지나는 고을에서, 3월 중순부터는 장날을 맞은 시골 장터에서 만세가 이어졌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은 소식을 퍼뜨리고 함께 모이기에 알맞은 날이었다.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유관순은 3월 1일과 5일 서울의 시위에 함께했고, 5일에는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3월 10일 총독부가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3월 13일 기차를 타고 고향인 천안 목천군 지령리로 내려왔다.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다. 그의 집안은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마을에는 감리교회가 있었다.

총독부가 학교 문을 닫은 것은 학생들이 시위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교령은 오히려 학생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서울의 만세를 시골로 퍼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관순처럼 고향으로 내려간 학생들이 각지의 만세에 불을 붙인 일은 여러 고을에서 확인된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919년 3월, 마을이 뜻을 모으다

유관순은 서울에서 본 만세 운동을 마을 어른들에게 전했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감리교 속장 조인원,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 등이 뜻을 모았다. 날은 4월 1일, 음력 3월 1일로 정해졌다. 그날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아우내 장날이었다. 이웃 마을과 교회, 학교에 연락이 오갔고 태극기가 준비되었다. 유관순이 이웃 고을을 돌며 참여를 권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전개 — 3월 31일 밤, 산마루의 봉화

장날 전날인 3월 31일 밤, 인근 산마루에 봉화가 올랐다고 전한다. 다음 날의 만세를 알리는 신호였다. 지금도 천안에서는 이 일을 기리는 아우내 봉화제가 열린다.

결말 — 4월 1일 오후, 아우내 장터

4월 1일 오후 1시쯤,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의 아우내 장터에 3천여 명이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읽고 태극기를 나누어 들고 만세를 불렀다.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과 천안에서 온 헌병들이 총을 쏘았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를 비롯한 19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30여 명이 크게 다쳤다. 김구응도 이날 순국했다.

연표로 보는 유관순의 마지막 한 해 반

날짜만 늘어놓아도, 한 학생이 서울과 고향과 감옥을 오가며 보낸 시간이 한 해 반 남짓이었다는 것이 보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부모를 잃었고, 재판정에서 일제의 재판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감옥 안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재판과 서대문감옥

유관순은 주동자로 붙잡혀 공주로 옮겨졌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그는 일제에게 조선 사람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며 더 상고하지 않았다. 숙부 유중무와 조인원 등 함께 만세를 준비한 사람들도 징역형을 받았다.

서대문감옥에 갇힌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 만세를 이끌었다. 이 일로 그는 더 엄한 처우를 받았다고 전한다. 4월 28일 특사로 형기가 1년 6개월로 줄었지만, 그해 9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왔고,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묘는 뒤에 공동묘지가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주요 인물

유관순
이화학당 학생. 고향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고,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유중권과 이소제
유관순의 부모. 아우내 장터에서 헌병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중무
유관순의 숙부. 만세 운동을 함께 준비했다.
조인원
감리교 속장.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이끌었다.
김구응
진명학교 교사. 아우내 만세 날 순국했다.
유우석
유관순의 오빠. 같은 무렵 공주 영명학교 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곳

천안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 사적지가 있다. 생가와 그가 다니던 교회가 복원되어 있고, 기념관에서 그의 생애와 아우내 만세운동을 보여 준다. 사라진 묘를 대신해 매봉산 기슭에는 넋을 불러 모신 초혼묘가 있다.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는 여성 수감자들이 갇혔던 옥사가 복원되어, 유관순과 함께 갇혔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정부는 1962년 유관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19년에는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더해 추서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해였다. 그날 목숨을 잃은 부모를 비롯해 아우내 만세에 함께한 여러 사람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아우내의 만세가 한 집안과 한 마을의 일이었음을 보여 준다.

자주 헷갈리는 점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은 사람이 조인원인지 김구응인지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 유관순이 태어난 해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02년으로, 공훈록 등은 1901년으로 적는다. 아우내라는 이름은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풀이되며, 한자로는 병천이라 쓴다.

아우내 만세운동을 유관순 한 사람의 일로만 기억하는 것도 다시 볼 대목이다. 아우내의 만세는 한 학생의 이야기이자 한 마을의 이야기다. 서울의 만세가 기차를 타고 시골 장터로 옮겨 갔고, 그 장터에서 부모와 이웃이 함께 목숨을 잃었다. 3·1운동이 몇몇 지도자의 일이 아니라 전국 곳곳의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든 운동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지령리 교회의 젊은 교인, 아우내 장터 주막집 아들, 이화학당에서 함께 내려온 학생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일제강점기,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와 지령리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919년 3월, 서울의 여학교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은 서울에서 만세를 불렀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리자 13일 기차를 타고 고향 지령리로 돌아온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교회 소모임을 이끄는 조인원과 마을 어른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뜻을 모은다. 날은 4월 1일, 음력 삼월 초하루 아우내 장날로 정해진다. 전날 밤 산마루마다 봉화(횃불 신호)가 오른다.

그날 오후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이 만세를 부른다. 헌병(군대 소속 경찰)들이 총을 쏘고,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해 열아홉 사람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붙잡혀 간 유관순은 이듬해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19년 3월 13일, 지령리

관순이 서울에서 본 일을 이야기하자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장날까지 남은 날은 보름 남짓이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919년 3월 하순, 이웃 마을들

관순과 어른들이 이웃 마을을 돌며 장날 일을 알린다. 밤마다 태극기를 그리는 손이 늘어 간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이름(평판·여론), 사람(인맥),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919년 3월 31일 밤, 봉화가 오른 산마루

산마루마다 봉화가 올랐다. 내일이면 장꾼들 사이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천안 쪽에서 헌병이 올 수 있다는 말이 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이름(평판·여론),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919년 4월 1일 오후, 아우내 장터

만세 소리가 장터를 덮었다. 주재소 앞에서 헌병들이 총을 들고, 천안 쪽 큰길에서 먼지가 일어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헌병의 발포로 유중권과 이소제를 비롯한 19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유관순은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만세를 이끌다 1920년 9월 28일 순국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이화학당
서울의 여학교. 지금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뿌리
휴교령
학교 문을 닫게 한 명령
속장
감리교회의 작은 모임을 이끄는 사람
순국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
경성복심법원
서울의 2심 법원
상고
2심 판결에 불복해 최고 법원에 다시 재판을 청함
봉화
횃불 신호
헌병
군대 소속 경찰
헌병주재소
헌병이 머무는 파출소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919년, 아우내 장날.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