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봉오동 전투
1920년 · 일제강점기 · 앞당기기
봉오동 전투 — 봉오동 골짜기의 매복
한눈에 보기
- 언제
- 1920년 · 일제강점기
- 어디서
-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
- 무슨 일
- 1920년 6월 7일 홍범도 등이 이끈 독립군이 만주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크게 이겼다(봉오동 전투).
- 왜 앞당기나
- 흩어진 부대가 하나로 뭉친 건 5월 말이었다. 그사이 일본군이 국경 마을을 뒤졌고, 며칠 전 싸움에선 동포들이 목숨을 잃었다.
- 이야기 속 목표
- 흩어진 독립군을 더 일찍 하나로 묶어 봉오동 싸움의 승리를 앞당긴다
배경: 간도의 독립군
1919년 3월의 만세 운동은 두만강 건너 간도까지 번졌다. 간도는 두만강 북쪽, 한인이 많이 살던 만주 땅이다. 19세기 후반부터 굶주림과 수탈을 피해 건너간 사람들이 땅을 일구어 마을을 이루었고, 1910년 나라를 잃은 뒤에는 독립운동가들이 학교와 교회를 세우며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해 가을부터 간도의 독립군은 여러 차례 두만강을 건너 국경의 일본군 초소를 치고 돌아왔다. 그중에서도 이름난 부대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었다.
그러나 간도의 독립군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었다.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이 저마다 활동했다. 최진동의 동생 최운산은 군자금을 대고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봉오동은 최씨 형제 집안이 터를 닦은 마을이기도 했다. 최운산이 땅을 팔아 무기를 샀다는 이야기도 후손의 증언으로 전한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920년 5월 말, 세 부대가 하나로
1920년 5월 27일 또는 28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이 대한북로독군부라는 이름으로 연합했다. 사령관은 최진동이었고, 실제 전투 지휘는 연대장 홍범도가 맡았다. 안무는 부관이 되었다.
전개 — 6월 4일과 6일, 국경의 싸움
6월 4일, 홍범도와 최진동 부대의 1개 소대가 근거지 삼둔자를 나서 두만강 건너 종성군 강양동의 헌병 초소를 쳤다. 6월 6일 일본군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가 강을 건너 쫓아왔다. 독립군은 이화일의 소대가 적을 끌어들이고,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숨어 있다가 이들을 깨뜨렸다. 이 싸움에서 독립군 2명과 동포 9명이 숨졌다. 패한 소식을 들은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대를 보냈다.
결말 — 6월 7일, 봉오동 골짜기
6월 7일, 독립군은 봉오동 골짜기의 네 곳에 중대를 숨겼다. 이천오의 중대가 상촌 서북쪽에, 강상모의 중대가 동쪽 고지에, 강시범의 중대가 북쪽 고지에, 조권식의 중대가 서산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이끌고 나가 일본군 선봉을 봉오동 어귀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일본군이 골짜기 깊숙이 들어오자 세 방향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두만강 건너 온성 유원진으로 물러났다.
연표로 보는 열하루
- 5월 27일 또는 28일 군무도독부, 대한독립군, 국민회군이 대한북로독군부로 연합한다.
- 6월 4일 독립군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종성군 강양동의 헌병 초소를 친다.
- 6월 6일 쫓아온 일본군 남양수비대 중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서 깨뜨린다.
- 6월 6일 이후 패전 소식을 들은 일본군 제19사단이 월강추격대대를 보낸다.
- 6월 7일 봉오동 골짜기의 매복과 협공. 일본군이 온성 유원진으로 물러난다.
골짜기를 고른 까닭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멀지 않은 긴 골짜기로, 아래쪽부터 하촌, 중촌, 상촌의 마을이 이어져 있었다. 골짜기 양쪽으로 산줄기가 높게 이어지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지형이었다. 적이 골짜기 깊숙이 들어오면 앞과 양옆의 높은 곳에서 한꺼번에 내려다보며 칠 수 있었다. 수가 적고 무기가 모자란 독립군이 정규군과 맞서려면, 싸움터를 스스로 고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이 싸움의 핵심은 끌어들이기였다. 앞서 삼둔자에서 이화일 소대가 그랬듯, 봉오동에서도 일부 부대가 먼저 나가 적과 부딪친 뒤 물러나며 길을 내주었다. 싸움에 앞서 골짜기 마을 주민들을 미리 피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방식은 넉 달 뒤 청산리에서 다시 쓰였다. 세 부대가 하나로 묶인 지 열흘 남짓 만에 이런 작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각 부대가 이미 국경을 넘나들며 싸운 경험을 쌓아 두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숫자로 보는 봉오동: 기록마다 다른 전과
봉오동 전투의 전과는 기록에 따라 크게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군 전사 157명, 부상 200여 명, 독립군 전사 4명으로 적는다. 이 숫자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쪽 발표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일본 측의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일본군 전사를 1명으로 적었다. 이긴 쪽은 부풀리고 진 쪽은 줄이기 쉬우니, 어느 한쪽 숫자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군이 추격을 멈추고 국경 너머로 물러났다는 점은 양쪽 기록이 함께 보여 준다.
그날까지 잃은 것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하나로 묶인 것은 5월 말이었다. 그 전까지 부대들은 따로 겨울을 나며 시간과 무기를 잃었고, 연합한 지 열흘 만에 벌어진 삼둔자 일대의 싸움에서는 동포들이 유탄에 목숨을 잃었다.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가 이 사건을 ‘앞당기기’로 그린 것은, 연합이 더 일렀다면 골짜기로 적을 끌어들이는 날도 그만큼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가정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의 가설이다.
주요 인물
- 홍범도
- 대한독립군을 이끈 독립군 지도자. 포수 출신으로, 봉오동에서 실제 전투를 지휘하며 적을 골짜기로 끌어들였다.
- 최진동
- 군무도독부를 이끌었고, 대한북로독군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 최운산
- 최진동의 동생. 군자금과 근거지를 마련했다.
- 안무
- 국민회군을 이끌었고, 연합 부대의 부관이 되었다.
- 이화일
- 삼둔자 싸움에서 일본군을 끌어들인 소대장.
- 야스카와 지로
- 봉오동으로 들어온 일본군 대대의 지휘관.
더 알아 둘 점
홍범도의 직함은 자료에 따라 대한독립군 사령관, 연대장 등으로 다르게 쓰인다. 사령관 최진동과 연대장 홍범도 가운데 누가 전투를 실제로 이끌었는지를 두고도 서술이 갈리며, 최씨 형제의 몫을 더 크게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글은 백과사전의 정리를 따랐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맞붙어 크게 이긴 첫 싸움으로 꼽힌다. 이 승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지만, 일본이 간도에 대군을 보내는 계기도 되었다. 넉 달 뒤 청산리에서 더 큰 싸움이 벌어졌고, 그 뒤 간도의 한인 마을들은 경신참변이라는 큰 고통을 겪었다. 홍범도는 뒤에 연해주를 거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유해는 2021년 광복절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앞당기기’ 이야기다. 나는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본인으로 깨어난다. 포수(사냥꾼) 출신으로, 산에서 총 한 자루로 버텨 온 사람이다. 국경 마을마다 내 이름을 넣은 노래가 불린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으니, 준비와 사람과 정보로 그날을 더 일찍 오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일제강점기,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919년 3월, 만세 소리가 간도(두만강 북쪽, 한인이 많이 살던 만주 땅)까지 번졌다. 그해 가을부터 홍범도의 독립군 부대 대한독립군은 여러 차례 두만강을 건너 국경의 일본군 초소를 치고 돌아왔다.
그러나 간도의 독립군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다. 최진동, 안무의 부대와 함께 대한북로독군부(여러 독립군을 합친 부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1920년 5월 말이다.
6월 7일,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온 일본군이 세 방향에서 쏟아진 총탄에 물러난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나는 안다. 더 일찍 올 수도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20년 2월, 간도의 겨울
눈 덮인 골짜기마다 독립군 부대가 따로 겨울을 난다. 총은 모자라고, 부대마다 대장과 규칙이 다르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재물(물자), 정보(지식)의 기반을 다진다.
- 최진동·안무와 마주 앉아 하나의 군대를 만들자고 한다 사람
세 부대가 일찍 하나가 되어 함께 싸운다. - 최운산 형제와 동포들에게 총 살 돈을 모은다 재물
대원들 손에 쥘 총이 늘어난다. - 두만강 건너 일본군 수비대의 순찰 시각을 알아 둔다 정보
일본군을 어디로 끌어들일지 그림이 나온다.
넷째 장 · 전개 — 1920년 4월, 봉오동
봉오동은 골짜기가 길고 양쪽 산이 가파르다. 최씨 집안이 일군 마을 셋이 골짜기 안에 늘어서 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능선마다 올라 골짜기 어귀가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찾는다 정보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숨어 칠 자리를 찾는다. - 새로 온 대원들에게 사격과 산길 행군을 가르친다 힘
신병들이 신호 한 번에 움직이는 군사가 된다. - 국경 마을을 돌며 독립군에 들 젊은이를 부른다 이름
독립군 수가 크게 늘어난다.
다섯째 장 · 전개 — 1920년 5월, 대한북로독군부
세 부대가 하나로 묶였다. 강 건너 일본군 수비대(국경을 지키는 부대)는 국경을 넘나드는 독립군을 쫓아 간도로 들어올 구실을 찾고 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재물(물자),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 부대를 중대로 나눠 골짜기 세 방향에 매복 자리를 정한다 힘
세 방향에서 한꺼번에 총을 쏠 수 있다. - 골짜기 마을의 곡식과 탄약을 산 위 숲으로 옮긴다 재물
싸움이 길어져도 굶거나 탄약이 떨어지지 않는다. - 골짜기 마을 사람들에게 미리 피할 곳을 일러 둔다 사람
싸움터에서 동포가 다치지 않는다.
여섯째 장 · 그날 — 1920년 5월 하순, 봉오동 어귀
강 건너 일본군 수비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국경 마을들을 하나씩 뒤지기 전에, 골짜기 안으로 먼저 불러들여 숨어 기다리던 총구 앞에 세워야 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작은 부대를 내보내 추격대를 골짜기로 끌어들인다 힘
일본군이 골짜기에 빠져 보름 일찍 무너진다. - 수비대가 움직이는 날을 미리 알아 매복을 맞춘다 정보
매복을 미리 맞춰 승리가 보름 앞당겨진다. - 마을을 비우고 골짜기 전체를 한 덫으로 만든다 사람
동포 피해 없이 보름 일찍 이긴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끈 연합 부대가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크게 이겼다. 그 며칠 전 삼둔자 일대의 싸움에서는 동포 여럿이 유탄에 목숨을 잃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대한북로독군부
- 1920년 5월 간도의 세 독립군 부대가 합친 연합 부대
- 매복
- 숨어 있다가 적을 기습함
- 협공
- 여러 방향에서 함께 공격함
- 왕청현
- 중국 길림성 동쪽의 고을. 간도의 일부
- 월강
- 강을 건넘. 여기서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들어감
- 간도
- 두만강 북쪽, 한인이 많이 살던 만주 땅
- 수비대
- 국경을 지키는 부대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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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oul.co.kr · 최운산 인터뷰
- seoul.co.kr · 일본 측 전투상보
1920년, 봉오동 골짜기의 매복.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