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윤봉길 의거와 그날 오후
1932년 · 일제강점기 · 막기
윤봉길 의거와 그날 오후 — 훙커우 그날 오후
한눈에 보기
- 언제
- 1932년 · 일제강점기
- 어디서
- 상하이 프랑스 조계
- 무슨 일
-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의 일본군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윤봉길 의거). 그날 오후 일본 경찰이 한인들을 잡으러 나섰다.
- 무엇이 문제였나
- 독립운동 지도자 안창호가 붙잡혀 옥고 끝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떠돌게 되었다.
- 이야기 속 목표
- 윤봉길 의거 뒤 몰아칠 일본 경찰의 검거에서 안창호와 임시정부 사람들을 지킨다
배경: 힘을 잃어 가던 임시정부
1919년 상하이에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대를 지나며 자금과 사람이 줄어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국내와 잇던 비밀 연락망이 끊기고, 독립운동의 노선을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많은 이들이 상하이를 떠났다. 1931년 김구는 임시정부를 다시 일으키려 한인애국단을 만들었다. 목숨을 걸고 일제의 요인을 겨냥하는 의열 투쟁으로 세계의 눈을 다시 모으려는 것이었다.
같은 해 9월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빠르게 나빠졌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본 왕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의거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봉창은 그해 10월 10일 처형되었다. 같은 달 1월 28일에는 상하이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맞붙은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4월 26일과 29일 아침
4월 26일,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들어가며 선서를 했다. 일본은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하이 사변의 승리를 함께 축하하는 기념식을 열 예정이었다. 그날 아침, 윤봉길은 김구와 시계를 바꾸어 찼다고 전한다. 자기 시계가 더 좋으니 바꾸자는 말과 함께였다는 이야기다.
전개 — 4월 29일, 훙커우공원
윤봉길은 훙커우공원의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의거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데이지가 목숨을 잃었고, 주중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 여러 요인이 크게 다쳤다.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고,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순국했다. 이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다시 보게 만들었고, 그 뒤 중국 정부의 지원이 크게 늘었다.
결말 — 4월 29일 오후, 프랑스 조계
같은 날 오후, 프랑스가 다스리던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프랑스 조계 경찰과 일본 영사관 경찰이 한인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도산 안창호는 흥사단 단우 이유필의 집에 들렀다가 붙잡혔다. 한 소년과 한 기부 약속을 지키러 나섰다가 붙잡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구와 이동녕 등은 미국인 선교사 조지 피치의 집에 숨었다. 5월 10일 무렵 김구는 이 의거가 한인애국단의 일이라고 세상에 밝혔다. 다른 한인들이 억울하게 붙잡혀 고초를 겪지 않게 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는 상하이를 빠져나가 자싱으로 피했고, 그곳에서 중국인 저보성 일가의 보호를 받았다. 임시정부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옮겼다.
주요 인물
- 김구
- 한인애국단 단장.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이끌었고, 의거 뒤 자싱으로 피했다.
- 윤봉길
- 충청도 예산 출신의 한인애국단원. 훙커우공원에서 의거를 일으켰고, 1932년 12월 19일 순국했다.
- 이봉창
- 한인애국단원. 1932년 1월 도쿄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 안창호
-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흥사단을 만든 사람. 의거 당일 오후 붙잡혀 옥고를 치렀고, 1938년 세상을 떠났다.
- 조지 피치
- 상하이의 미국인 선교사. 김구 등에게 은신처를 내주었다.
- 저보성
- 자싱에서 김구를 숨겨 준 중국인 정치가.
- 쑹칭링
- 쑨원의 부인. 안창호를 구하기 위해 교섭에 나섰다.
붙잡힌 도산, 그 뒤
그동안 프랑스 조계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조계 당국이 일본의 체포 요구에 쉽게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은 프랑스 조계 경찰이 일본 영사관 경찰과 함께 움직였고, 조계는 더 이상 한인을 지켜 주는 피난처가 아니었다. 안창호는 국내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1935년 가출옥으로 풀려났지만, 1937년 그가 이끌던 수양동우회와 관련된 사람들이 대거 붙잡힌 동우회 사건 때 다시 갇혔다. 병이 깊어져 보석으로 나왔으나 1938년 3월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흥사단과 학교를 세우며 강조한 것은 힘을 기르는 일, 곧 사람을 기르는 교육과 서로 믿는 조직이었다. 상하이 시절 그는 임시정부 안의 갈라진 세력들을 잇는 일을 오래 맡았다. 그날 오후의 체포가 임시정부에 남긴 빈자리가 컸던 까닭이다.
임시정부의 긴 이동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일본군이 중국 안쪽으로 밀고 들어올 때마다 자리를 옮겼다. 이 시기를 흔히 이동 시기라 부른다. 대강의 길은 이렇다.
- 1932년
-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간다. 김구는 한동안 자싱과 그 주변에 숨어 지낸다.
- 1935년
- 전장으로 옮긴다.
- 1937~1938년
- 중일전쟁이 터지자 창사, 광저우, 류저우로 잇달아 옮긴다.
- 1939년
- 충칭 가까운 치장에 머문다.
- 1940년
- 충칭에 자리 잡고, 그해 한국광복군을 만든다.
윤봉길 의거 뒤 늘어난 중국의 지원은 이 긴 길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1933년에는 중국 군관학교의 뤄양 분교에 한인 청년들을 위한 특별반이 열려, 뒤에 광복군의 바탕이 될 사람들을 길렀다.
오늘날 남은 곳과 더 알아 둘 점
윤봉길과 이봉창의 유해는 광복 뒤인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와, 백정기와 함께 서울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에 묻혔다. 훙커우공원은 지금 루쉰공원으로 불리며 그 안에 윤봉길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상하이에는 임시정부가 쓰던 청사 건물과 피치 목사의 집도 남아 있다.
이 글은 의거 그 자체보다 그날 오후에 주목한다. 같은 날 오후의 검거로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가 붙잡혔고, 임시정부는 근거지를 잃고 긴 이동을 시작했다. 한 사건의 빛과 그늘이 같은 하루 안에 있었다. 안창호가 붙잡힌 집의 주인 이름은 이유필로도 이필우로도 적혀, 이유필로 보는 쪽이 많지만 확인이 더 필요하다. 소년과의 약속 이야기와 시계를 바꾼 이야기도 회고에 기대어 전해지는 것이라, 세부는 조금씩 다르게 전한다.
이 시기의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적은 기록은 김구가 남긴 『백범일지』다. 한인애국단을 만든 경위, 이봉창과 윤봉길을 만나 의거를 준비한 과정, 의거 뒤 피신하던 날들이 그의 눈으로 적혀 있다. 다만 회고록이라 날짜나 세부가 다른 기록과 어긋나는 곳이 있어, 연구자들은 일본 쪽 수사 기록이나 당시 신문과 함께 맞대어 읽는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상하이 한인 소년단의 단원, 프랑스 조계 공부국의 한인 통역, 피치 목사 집의 중국인 요리사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일제강점기, 상하이 프랑스 조계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931년 김구는 힘을 잃어 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살리려 한인애국단(목숨 건 의거를 맡은 비밀 단체)을 만들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진다.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김구와 시계를 바꾸어 차고 훙커우공원으로 향한다. 그날의 의거는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다시 보게 만든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프랑스 조계(프랑스가 다스리던 상하이 안 구역)에서 검거가 벌어지고, 약속을 지키러 나선 도산 안창호가 붙잡힌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32년 2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도쿄 소식이 신문에 실리고, 1월 28일에는 상하이에서 전쟁이 터졌다. 일본 영사관 경찰이 공부국(조계의 행정·경찰 관청) 경찰서를 자주 드나든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 소년단 활동으로 교민 집집을 돌며 얼굴을 익힌다 사람
내가 문을 두드리면 교민들이 믿고 연다. - 공부국 경찰의 한인 통역과 가까워진다 정보
일본 영사관이 누구를 노리는지 미리 듣는다. - 프랑스 조계 골목과 뒷문을 지도로 그린다 힘
쫓길 때 빠져나갈 뒷문을 안다.
넷째 장 · 전개 — 1932년 4월, 상하이
김구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낌새가 있다. 도산 선생은 소년단 아이들에게 4월 29일 기부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재물(물자),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임정 문서와 인장을 옮길 상자와 짐꾼을 구해 둔다 재물
임시정부 기록을 들키지 않고 옮길 수 있다. - 피치 목사 가족과 영어로 말을 트는 사이가 된다 사람
급할 때 숨을 수 있는 미국인 집이 생긴다. - 교민들 사이에 도산 선생 심부름꾼으로 이름이 난다 이름
내가 전하는 말을 교민들이 의심 없이 따른다.
다섯째 장 · 전개 — 1932년 4월 28일, 의거 전날
내일 훙커우공원에서 천장절(일본 왕의 생일) 기념식이 열린다. 조계 안의 한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저녁을 먹는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재물(물자),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 공부국 통역에게서 영사관이 찾는 이름들을 엿듣는다 정보
내일 누가 위험한지 미리 안다. - 자싱행 배표와 은신처 쌀값을 미리 치러 둔다 재물
쫓기는 사람들이 상하이를 빠져나갈 수 있다. - 도산 선생 댁에서 이유필 댁까지 뒷길을 걸어 본다 힘
눈에 띄지 않고 사람을 옮길 길을 안다.
여섯째 장 · 그날 — 1932년 4월 29일 오후, 프랑스 조계
훙커우에서 소식이 날아들었다. 도산 선생은 소년단 아이와의 기부금 약속을 지키러 임시정부 사람 이유필의 집으로 나서려 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제가 받으러 갈게요" 하고 대신 심부름을 나선다 사람
안창호가 집에 머물러 붙잡히지 않는다. - 영사관이 찾는 이름들에게 오늘 밤 집을 비우라고 알린다 정보
경찰이 들이닥친 집들이 비어 검거를 피한다. - 임정 문서와 인장을 찻잎 상자에 담아 빼낸다 재물
임시정부 기록과 도장이 일본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안창호는 그날 이유필의 집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193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구는 피치 목사 집에 숨었다가 자싱으로 피했고, 임시정부도 상하이를 떠났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한인애국단
- 김구가 1931년 만든 의열 투쟁 단체
- 의거
- 정의를 위해 일으킨 일
- 천장절
- 일본 왕의 생일을 기념하던 날
- 흥사단
- 안창호가 1913년 미국에서 만든 민족 운동 단체
- 자싱
- 상하이 남서쪽의 도시
- 조계
- 외국이 행정권을 쥐고 다스리던 중국 도시 안의 구역
- 가출옥
- 형기를 다 채우기 전에 조건을 붙여 내보냄
- 공부국
- 조계의 행정·경찰 관청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1932년, 훙커우 그날 오후.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