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동학농민운동과 우금치 전투

1894년 · 개항기·대한제국 · 막기

동학농민운동과 우금치 전투 — 우금치 고개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894년 · 조선 고종 31년
어디서
전라도와 공주 우금치
무슨 일
1894년 전봉준이 이끈 농민들이 관리들의 수탈에 맞서 일어났다(동학농민운동). 일본군이 궁궐을 점령하자 농민군은 다시 일어나 공주로 갔다.
무엇이 문제였나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신식 총에 막혀 1만여 명이 500여 명으로 줄었다. 농민군은 무너지고 전봉준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야기 속 목표
우금치 고개에서 농민군이 몰살당하지 않고 살아남게 한다

배경: 수탈과 새로운 가르침

19세기 말 조선의 농민은 무거운 세금과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렸다. 이 무렵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친 동학이 농민들 사이에 퍼졌다. 1892년과 1893년, 동학교도들은 삼례와 보은에서 큰 집회를 열어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고 요구했다. 보은 집회에서는 일본과 서양을 물리치자는 구호도 나왔다. 종교 운동은 점점 사회를 바꾸자는 목소리로 커져 갔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894년 1월부터 4월까지, 고부에서 전주로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라는 저수지 물세를 거두는 등 농민을 쥐어짜자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농민들과 함께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조정이 보낸 안핵사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을 탄압했다. 3월 20일 무렵 농민군은 무장에서 다시 일어나 백산에 모였다. 4월 7일 황토현에서,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을 이긴 농민군은 4월 27일 전주성에 들어갔다.

전개 — 외국 군대가 들어오다

4월 29일 무렵, 조정은 민영준이 앞장서 청나라에 군대를 청했다. 5월 5일부터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내세워 인천에 대군을 들여보냈다. 농민군은 외국 군대가 물러나기를 바라며 5월 7일 무렵 조정과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전라도의 고을마다 농민이 꾸리는 자치 기구인 집강소가 들어섰고, 7월에는 전라감사 김학진과 이를 협의했다.

그러나 외국 군대는 물러가지 않았다.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틀 뒤 풍도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고, 조정에서는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결말 — 1894년 9월부터 1895년 3월까지, 우금치

9월,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자는 척왜를 내걸고 삼례에서 다시 일어났다. 동학의 교주 최시형도 9월 18일 북접의 봉기를 허락했고, 10월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논산에서 합류했다.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이인과 효포에서 첫 접전이 있었다.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 부대를 공격했다. 고지에 자리 잡은 일본군과 관군은 신식 총으로 농민군을 막았다. 전봉준은 뒤에 재판에서, 두 차례 싸움 뒤 1만여 명이던 군사를 세어 보니 5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 뒤 농민군은 논산과 원평, 태인에서 잇따라 졌다. 김개남은 11월 13일 청주성 공격에 실패했다. 12월 2일,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에서 옛 부하의 밀고로 붙잡혔고, 이듬해 3월 29일 손화중, 김덕명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전주화약과 집강소의 여름

전주화약에서 농민군은 탐관오리를 벌하고 무거운 세금을 고치는 등 여러 개혁을 요구했다. 흔히 ‘폐정개혁안 12개조’로 알려진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뒷날 오지영이 쓴 『동학사』에 실린 것이어서 실제 요구 그대로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다른 기록에 남은 요구 조목과 견주어 읽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집강소는 농민군이 고을 관아와 함께, 또는 관아를 대신해 일을 처리한 기구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과 만나 전주 감영에 집강소의 총본부 격인 기구를 두는 데 뜻을 모았다. 관리와 농민이 한 고을의 일을 함께 다룬 이 짧은 여름은 조선에서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이 이 실험을 오래가지 못하게 했다.

우금치라는 고개

우금치는 공주 남쪽, 논산 쪽에서 공주 감영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고개다. 공주는 충청도 감영이 있던 곳으로, 이곳을 차지하면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열렸다. 농민군이 공주를 노린 까닭이다. 관군과 일본군은 우금치를 비롯한 공주 남쪽의 높은 곳들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싸움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쪽에 불리했다. 게다가 무기의 차이가 컸다. 농민군의 상당수는 화승총이나 창, 죽창을 들었고, 일본군은 멀리서도 빠르게 쏠 수 있는 신식 소총을 갖추고 있었다. 농민군은 며칠 동안 수십 차례 고개를 향해 올라갔다고 전한다. 그 사이 고개 아래에 쓰러진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우금치의 패배로 농민군은 다시 대오를 갖추지 못했다.

주요 인물

전봉준
녹두장군이라 불린 남접의 지도자. 고부 봉기부터 우금치까지 농민군을 이끌었다.
김개남과 손화중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을 이끈 지도자들.
최시형과 손병희
동학의 교주와 북접의 통령. 2차 봉기에 북접이 합류했다.
조병갑
고부 군수. 그의 수탈이 봉기의 시작이 되었다.
김학진
전라감사. 전주화약 뒤 농민군과 집강소를 협의했다.
민영준
청나라에 군대를 청하는 일을 앞장서 이끈 관료.

이름이 여러 개인 까닭

이 사건은 동학란,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조선 조정과 당시 양반들은 난리라는 뜻으로 ‘동학란’이라 불렀다. 뒤에 연구가 쌓이면서 농민이 중심이 된 운동이라는 점, 일본군과 싸운 전쟁이라는 점, 사회를 바꾸려 한 혁명이라는 점에 각각 무게를 둔 이름들이 나왔다. 교과서는 오랫동안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이름을 썼고, 법률과 국가기념일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이 쓰인다. 어느 이름을 쓰느냐는 이 한 해를 어떻게 보느냐와 이어져 있다.

더 알아 둘 점

동학농민운동은 종교 운동이자 농민 항쟁이었고, 2차 봉기에 이르러서는 외국 군대에 맞선 싸움이 되었다. 조정이 농민을 누르려 청을 불러들인 일이 일본군까지 불러들였고, 그 군대가 궁궐을 점령하고 농민군을 막는 데까지 이어졌다는 점이 이 해의 비극이다.

우금치 전투의 날짜는 음력이고, 양력으로는 12월 초 무렵이다. 자료마다 날짜를 조금씩 다르게 적고, 공주 일대의 싸움 전체를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까지로 넓게 보기도 한다. 전봉준이 붙잡힌 뒤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영사가 함께한 자리에서 받은 다섯 차례의 신문 기록은 『전봉준 공초』로 남아, 그가 왜 일어섰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는 드문 자료가 되었다.

오늘날의 기억

공주 우금치에는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서 있고, 정읍 황토현 일대에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기념관과 전적지가 있다. 2004년에는 참여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특별법이 만들어져, 그동안 반역의 이름으로 묻혀 있던 사람들과 그 후손이 다시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2019년에는 황토현 승리의 날을 기준으로 5월 11일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정해졌다. 전봉준은 지금도 녹두장군이라는 이름과 ‘새야 새야 파랑새야’ 같은 노래로 기억된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고부 장터의 엿장수 소년, 전라감영의 어린 통인, 경리청의 젊은 병정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조선 고종 31년, 전라도와 공주 우금치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갑오년 정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을 쥐어짜자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고부 관아를 점령한다. 3월 다시 일어난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에서 관군을 이기고 4월 27일 전주성에 들어간다.

조정은 청에 군사를 청하고, 일본도 청과 맺은 톈진조약을 내세워 대군을 보낸다. 농민군은 전주화약(조정과의 휴전 약속)을 맺고 물러나 집강소(농민이 꾸린 고을 자치 기구)를 세우지만,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다.

9월, 농민군은 척왜(일본을 몰아내자)를 내걸고 다시 일어나 공주로 향한다. 11월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1만여 명이 500여 명으로 줄었다는 기록이 남는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894년 4월 27일, 전주성에 들어간 날

농민군이 전주성에 들어가자 한양 조정이 술렁인다. 세도가 민영준이 청에 군대를 청하자는 말을 꺼냈다는 소문이 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894년 7월, 전라도 집강소

전주화약 뒤 고을마다 집강소가 섰다. 그러나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고, 풍도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내려온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이름(평판·여론), 힘(무력·조직),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894년 10월 23일 무렵, 공주 이인과 효포

전라도의 남접과 충청도의 북접, 두 갈래 농민군이 논산에서 합쳐 공주로 올라왔다. 이인과 효포에서 첫 접전이 벌어졌고, 고지 위 신식 총소리가 들판을 울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894년 11월 8일, 공주 우금치 아래

농민군이 우금치 고개 아래로 모여든다. 고개 위에는 관군과 일본군이 신식 총을 걸고 기다린다. 내일 아침이면 돌격이 시작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1월 우금치에서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신식 총 앞에 크게 패했다. 전봉준은 12월 순창 피노리에서 붙잡혀 이듬해 3월 처형되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동학
최제우가 일으킨 종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가르침을 폈다
안핵사
지방의 사건을 조사하러 보낸 관리
톈진조약
1885년 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 서로 알리기로 한 약속
남접·북접
동학의 남쪽 조직과 북쪽 조직
공초
죄인을 신문하며 받아 적은 진술 기록
척왜
일본을 물리치자는 구호
전주화약
조정과의 휴전 약속
집강소
농민이 꾸린 고을 자치 기구
통문
돌려 읽는 알림 글
경리청
조정의 군영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894년, 우금치 고개.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