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헤이그 특사

1907년 · 개항기·대한제국 · 막기

헤이그 특사 — 헤이그로 간 세 사람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907년 · 대한제국 광무 11년
어디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헤이그
무슨 일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려고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셋을 몰래 보냈다(헤이그 특사).
무엇이 문제였나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준은 그곳에서 숨지고, 일본은 이를 구실로 고종을 물러나게 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이야기 속 목표
세계 평화 회의의 공식 기록에 대한제국의 목소리를 한 줄이라도 남긴다

배경: 외교권을 잃은 나라의 호소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었다. 고종은 이 조약이 자신의 재가 없이 강요된 것이니 무효라고 여겼고, 그 사실을 세계에 알릴 기회를 찾았다. 1906년, 러시아 황제가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을 초청할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과 관계를 고쳐 나가면서 대한제국은 이후 초청 명단에서 사실상 빠졌다. 같은 해 4월,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만국평화회의는 1899년 처음 헤이그에서 열렸다. 나라 사이의 다툼을 전쟁 대신 중재로 풀고, 전쟁을 하더라도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하자는 자리였다. 고종에게 이 회의는 한국 문제를 여러 나라 대표 앞에 한꺼번에 내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로 보였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907년 4월, 세 사람의 특사

고종은 이상설을 정사로, 전 평리원 검사 이준과 전 주러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부사로 삼았다. 위임장을 내린 날짜는 4월 20일로 널리 인용되지만, 자료에 따라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준은 4월 22일 무렵 서울을 떠났다.

전개 — 시베리아 철도에서 헤이그까지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에 올랐다. 6월 4일 무렵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한 이위종과 합류했다. 이위종은 전 주러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었다. 세 사람은 러시아의 도움을 구했지만, 러시아는 일본과의 협약을 앞두고 손을 뗐다. 회의는 6월 15일 이미 막을 올린 뒤였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묵던 융 호텔에 태극기를 걸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사정을 밝힌 공고사를 각국 대표에게 보냈고, 이 글은 『평화회의보』에 실렸다. 그러나 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와 네덜란드 외무대신은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잃었다는 이유로 만남과 참석을 거부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와 독일 대표도 차가웠다.

결말 — 7월 9일과 14일, 그리고 서울

7월 9일, 이위종은 『평화회의보』 발행인 스테드가 마련한 국제기자협회 자리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를 연설했다. 기자들은 공감했고 동정하는 결의가 나왔다. 연설 날짜를 7월 8일로 적는 자료도 있다.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은 이 일을 구실로 삼았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을 따졌고, 고종은 7월 19일과 20일 사이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7월 24일 정미7조약이 맺어졌고, 7월 31일 군대를 해산하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그 뒤 미국과 유럽, 연해주에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 갔다.

여정을 날짜로 따라가면

1907년 4월 22일 무렵
이준이 서울을 떠난다.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함께 시베리아 철도에 오른다.
6월 4일 무렵
페테르부르크에 닿아 이위종과 합류한다.
6월 15일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막한다. 특사들은 아직 길 위에 있다.
6월 25일
헤이그 도착. 융 호텔에 머문다.
6월 말
공고사를 각국 대표에게 보낸다. 의장과 주최국은 만남을 거부한다.
7월 9일
이위종이 국제기자협회에서 연설한다.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숨진다.
7월 19~20일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순종이 뒤를 잇는다.
7월 24일 · 31일
정미7조약이 맺어지고, 군대 해산 조칙이 내려진다.

주요 인물

고종
대한제국 황제. 특사를 보냈고, 이 일을 구실로 강제 퇴위되었다.
이상설
특사의 정사. 전 의정부 참찬으로,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1917년 연해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준
특사의 부사. 전 평리원 검사.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숨졌다.
이위종
특사의 부사. 여러 나라 말에 능해 헤이그에서 연설했다.
헐버트
특사 파견 전부터 대한제국을 도운 미국인 선교사.
스테드
영국의 언론인으로 『평화회의보』를 펴냈다. 특사들의 호소를 실어 주었다.
넬리도프
회의 의장이던 러시아 대표. 특사들의 참석을 거부했다.

회의장 밖에서 한 일

문이 닫히자 특사들은 회의장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이 기댄 것은 신문이었다. 회의 기간 동안 날마다 나오던 『평화회의보』는 각국 대표와 기자들이 함께 읽는 소식지였고, 여기에 공고사가 실리면서 대한제국의 이름이 회의장 안 사람들의 책상 위에 올랐다. 공고사는 일본이 황제의 뜻을 거슬러 조약을 맺었고, 그래서 대한제국이 대표를 보낼 수 없게 된 경위를 차례로 밝혔다.

이위종의 연설은 그 흐름의 정점이었다. 그는 통역 없이 프랑스어로 청중에게 직접 말했다고 전한다. 동정 결의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몇몇 서양 신문이 이 일을 기사로 다루었다. 1905년 이후 바깥으로 낼 목소리를 잃었던 대한제국으로서는 드문 기회였다.

그 뒤에 일어난 일

정미7조약으로 통감은 법령과 관리 임명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고, 각 부의 차관 자리에 일본인이 들어앉았다. 이른바 차관 정치다. 8월 1일 군대 해산식이 열리던 날,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에 분노한 병사들이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들어가면서 의병 전쟁은 훨씬 크고 조직적인 싸움이 되었다.

이상설은 연해주와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 단체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이준의 유해는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 수유리에 다시 묻혔다. 지금 헤이그에는 특사들이 묵었던 건물에 이준 열사 기념관이 있다.

자주 헷갈리는 점

이준의 죽음은 오랫동안 할복 자결로 잘못 알려졌다. 196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울분 속에 병을 얻어 숨졌다는 병사설이 유력하다. 이 글에서도 그 견해를 따른다. 특사가 세 사람만이었던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윤병구와 송헌주가 특사들과 함께하기 위해 건너왔고, 헐버트도 따로 유럽에서 활동했다.

헤이그 특사는 회의장 문을 열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외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위종의 연설과 『평화회의보』의 기사는 대한제국의 사정을 세계 언론에 직접 알린 일이었다. 동시에 일본은 이 일을 고종을 몰아내고 군대를 없애는 기회로 삼았다. 헤이그에서 서울까지, 한 달 사이에 나라의 운명이 크게 기울었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통역 청년, 상서원의 하급 관원, 헤이그 융 호텔의 조선인 시종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대한제국 광무 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헤이그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정미년 4월, 고종은 을사년의 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려고,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여러 나라가 모인 평화 회의)에 특사 셋을 보낸다. 이상설·이준·이위종이다. 4월 하순 이준이 서울을 떠난다.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에 오른다.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이 합류하지만, 러시아는 일본과의 협약을 앞두고 손을 뗀다.

6월 25일 헤이그에 닿은 세 사람 앞에서 회의장 문은 열리지 않는다. 7월 14일 이준은 헤이그에서 숨을 거두고, 일본은 이 일을 구실로 고종을 물러나게 한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07년 4월 20일 무렵, 경운궁

고종이 비밀리에 위임장을 내렸다. 통감부(일본이 세운 통치 기관)의 눈을 피해 이준이 곧 서울을 떠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907년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 역

이준과 이상설이 시베리아 철도에 오른다. 플랫폼 구석에서 낯선 동양인 하나가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907년 6월 4일 무렵, 페테르부르크

이위종이 합류했다. 러시아어·영어·프랑스어를 하는 젊은 외교관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과 협약을 협상하는 중이라 고개를 돌린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이름(평판·여론),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907년 6월 초,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외무부는 문을 닫았다. 헤이그 개막까지 열흘 남짓, 이대로 가면 빈손으로 회의장 앞에 서게 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특사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7월 9일 이위종의 연설만이 기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준은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숨졌고, 고종은 강제로 퇴위되었으며 곧 군대가 해산되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만국평화회의
여러 나라가 군비와 전쟁 규칙을 논의한 국제회의. 1907년이 두 번째였다
공고사
특사들이 각국 대표에게 보낸 호소문
퇴위
임금이 자리에서 물러남
정미7조약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을 쥐게 한 1907년의 조약
정사
사절단의 우두머리
부사
정사를 돕는 버금 사절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
상서원
옥새를 맡은 관청
위임장
특사임을 밝히는 황제의 문서
통감부
일본이 세운 통치 기관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907년, 헤이그로 간 세 사람.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