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07년 · 개항기·대한제국 · 막기
대한제국 군대 해산 — 훈련원으로 가는 아침
한눈에 보기
- 언제
- 1907년 · 대한제국 융희 원년
- 어디서
- 서울 시위대 병영과 훈련원
- 무슨 일
- 1907년 일본은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군대 해산). 병사들은 맨손으로 모이라는 명을 받았다.
- 무엇이 문제였나
- 해산 소식에 대대장 박승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분노한 병사들이 일본군과 싸워 남대문 일대에서 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 이야기 속 목표
- 군대가 해산되는 아침, 대대장 박승환이 홀로 목숨을 끊지 않고 병사들이 대열을 지킨 채 서울 밖으로 나가게 만든다
배경: 황제가 물러난 여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뒤에도 대한제국에는 아직 군대가 있었다. 서울에는 황궁과 도성을 지키는 시위대가, 지방에는 진위대가 있었다. 그 규모는 이미 여러 차례 줄어 있었지만, 일본이 보기에 그것은 여전히 손에 쥐어지지 않은 마지막 무력이었다.
1907년 6월, 고종이 보낸 특사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나타났다. 일본은 이 일을 구실로 고종을 압박했고, 7월 19일 고종은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그날 종로에는 분노한 군중이 몰려들었고, 그 사이에는 시위대 병사들도 섞여 있었다. 일본은 대한제국 군대가 언제든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7월 24일 정미7조약이 맺어졌다.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을 쥐게 하고, 일본인을 대한제국의 관리로 앉힐 수 있게 한 조약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조문 말고도, 조약에는 공개되지 않은 부속 각서가 붙어 있었다. 그 안에 황궁을 지킬 일부만 남기고 군대를 해산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날 아침까지
- 7월 19일 고종이 강제로 퇴위한다. 서울 거리에 군중과 일부 시위대 병사가 모인다.
- 7월 24일 정미7조약과 비공개 부속 각서가 맺어진다.
- 7월 31일 밤 군대 해산 조칙이 비밀리에 내려진다.
- 8월 1일 아침 장교들이 대관정으로 불려 가고, 병사들에게 훈련원 집합 지시가 내려진다. 박승환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 8월 1일 오전 시위대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일본군과 싸운다.
- 8월 1일 오후 훈련원에서 해산식이 열린다.
- 8월 5일·9일 원주진위대와 강화분견대가 일어난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7월 31일 밤, 조용히 내려진 조칙
7월 31일 밤,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의 이름으로 군대를 해산하라는 조칙이 비밀리에 내려졌다. 새 황제 순종의 이름으로 나온 명령이었다. 해산된 병사들에게는 계급에 따라 얼마간의 돈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는 방침도 함께 정해졌다.
전개 — 8월 1일 아침, 맨손으로 모이라는 명령
8월 1일 아침, 장교들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머물던 대관정으로 불려 갔다. 병사들에게는 맨손으로 훈련을 한다며 훈련원에 모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무기를 두고 오게 해서 저항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를 안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글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뜻으로 전한다.
결말 — 남대문과 서소문의 싸움
대대장의 죽음을 들은 병사들은 무기고를 다시 열었다. 오전부터 시위대 병사들과 일본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이웃한 제2연대 제1대대도 합세했다. 병영 담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싸움은 남대문에서 서소문 일대로 번졌다.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과 맞서 정교 남상덕을 비롯한 많은 병사가 전사했고, 남은 병사들은 탄약이 떨어지자 흩어졌다. 훈련원의 해산식은 그날 오후에 열려 한 시간 만에 끝났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그렇게 사라졌다. 해산식에 나온 병사들에게는 계급장을 떼게 하고 얼마간의 돈을 건넸다고 전한다.
그러나 싸움은 서울에서 끝나지 않았다. 8월 5일 원주진위대가 민긍호와 김덕제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8월 9일에는 강화분견대가 지홍윤과 연기우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흩어진 군인들은 각지의 의병에 합류했다.
주요 인물
- 박승환
-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해산 명령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죽음이 병사들의 봉기를 불렀다.
- 남상덕
- 시위대의 정교. 서울 싸움에서 전사했다.
- 이완용과 이병무
- 총리대신과 군부대신. 해산 조칙에 이름을 올렸다.
- 하세가와 요시미치
-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사령관. 해산 당일 장교들을 대관정으로 불러 모았다.
- 순종
- 고종의 뒤를 이은 대한제국 황제.
- 민긍호와 김덕제
- 원주진위대의 봉기를 이끌었고, 의병으로 싸움을 이었다.
- 지홍윤과 연기우
- 강화분견대의 봉기를 이끌었다.
왜 중요한가: 군인이 의병이 되다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이 스스로를 지킬 힘을 공식적으로 잃은 날이다. 동시에 의병 운동이 더 크고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훈련받은 군인들이 총과 전술을 가지고 의병에 합류하면서, 그전까지 유생과 농민 중심이던 의병은 전투력을 갖춘 부대로 바뀌었다. 1907년의 간지를 따 정미의병이라 부르는 이 흐름은 전국으로 번졌다.
그해 겨울에는 각지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모여 13도 창의군을 꾸렸고, 1908년 초 서울로 쳐들어가려는 서울 진공 작전을 폈다. 작전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해산 군인과 의병이 함께 나라를 되찾으려 한 큰 시도로 기억된다. 의병 전쟁은 그 뒤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을 거치며 국내에서 점차 밀려났고, 많은 사람이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의 뿌리가 되었다.
자주 헷갈리는 점
정미7조약은 한일신협약이라고도 부른다. 1907년이 정미년이라 붙은 이름이다. 2년 앞선 을사늑약이 외교권을 빼앗았다면, 정미7조약은 내정과 군대에 손을 댄 조약이었다. 군대 해산은 조약의 본문이 아니라 공개되지 않은 부속 각서에 담겨 있었다는 점도 자주 놓치는 대목이다.
또 군대 해산은 8월 1일 하루에 끝난 일이 아니다. 서울의 시위대가 먼저 해산되었고, 지방의 진위대는 그 뒤 몇 주에 걸쳐 차례로 해산되었다. 원주와 강화의 봉기는 이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의병 운동에 군인들이 합류한 흐름도 서울의 하루가 아니라 그해 여름과 가을 내내 전국으로 번져 갔다.
더 알아 둘 점
박승환이 목숨을 끊은 시각과 장소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관정 소집에 가지 않고 병영에 남아 있었다는 설명도 있다. 서울 싸움의 전사자 수도 68명으로 적는 자료가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양쪽의 피해를 적은 숫자는 기록마다 다르다. 분명한 것은 맨손으로 모이라는 명령 앞에서 병사들이 다시 무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날 거리에 남겨진 병사들의 이름도 다 전하지 않는다. 이름이 남은 박승환과 남상덕 곁에, 이름 없이 싸운 많은 병사가 있었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시위대 무기고를 맡은 하사, 박승환 대대의 문서 맡은 부위(하급 장교), 남대문 시장의 국밥집 주인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대한제국 융희 원년, 서울 시위대 병영과 훈련원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회의에 몰래 특사를 보낸 일을 빌미로, 고종은 칠월 열아흐레 일본의 압박에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날 종로에 몰려든 군중 사이에는 시위대(황궁과 서울을 지키는 군대) 병사들도 섞여 있었다.
칠월 스무나흘 맺어진 정미7조약(일본 통감이 나라 안 일을 쥐게 한 조약) 뒤에는 군대를 해산한다는 비밀 각서가 붙어 있다. 서른하루 밤, 총리대신 이완용 등의 이름으로 해산 조칙이 조용히 내려진다.
팔월 초하루 아침, 병사들은 맨손으로 훈련원(서울의 군사 훈련장)에 모이라는 명을 받는다.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은 그 아침을 넘기지 못한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07년 7월 19일, 종로
황제가 물러난다는 소식에 종로가 들끓는다. 병사 몇이 군중 편에 섰다가 붙잡혔고, 대대 막사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박승환 대대의 하사관들과 마음을 터놓는다 사람
대대장 곁을 지킬 사람들이 생긴다. - 신문사 기자에게 병영의 분위기를 알린다 이름
시위대를 지켜보는 눈이 늘어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 붙잡혔던 병사들 집에 쌀을 보낸다 재물
병사들이 나를 믿고 따르게 된다.
넷째 장 · 전개 — 1907년 7월 말, 시위대 병영
군대를 줄인다는 소문이 병영을 돈다. 일본군 교관들이 무기고 앞을 자주 기웃거리고, 탄약 상자를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군부를 드나드는 사환에게 조칙 소식을 묻는다 정보
해산이 언제 닥칠지 미리 안다. - 탄약 상자 몇을 장부에서 빼 따로 숨긴다 힘
무기고를 다 비워도 쓸 탄약이 남는다. - 시장 뒷골목에 병사들이 숨을 집과 옷을 마련한다 재물
군복을 벗은 병사들이 숨을 곳이 생긴다.
다섯째 장 · 전개 — 1907년 7월 31일 밤
대대 장교들에게 내일 아침 대관정(일본군 사령관이 머물던 집)으로 오라는 연락이 온다. 병사들에게는 맨손 훈련을 한다며 훈련원에 모이라는 명이 내려온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 박승환 곁에 밤새 남아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
대대장이 홀로 남지 않고 병사들과 갈 길을 생각한다. - 집합 장소와 시각을 대대에 먼저 알린다 정보
병사들이 함정을 알고 맨손으로 가지 않는다. - 무기고 열쇠를 믿을 만한 하사관들에게 나눈다 힘
누구도 무기고를 몰래 비우지 못한다.
여섯째 장 · 그날 — 1907년 8월 1일 아침, 시위대 병영
장교들은 대관정으로 불려 갔고, 병사들은 맨손으로 훈련원에 모일 채비를 한다. 대대장실 문은 아직 닫혀 있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대대장실 문을 두드려 박승환을 병사들 앞에 세운다 사람
대대장이 살아 병사들을 이끌고 서울을 빠져나간다. - 훈련원 대신 성 밖으로 흩어지라고 알린다 정보
서울 거리에서 총격전 없이 병사들이 살아남는다. - 숨겨 둔 탄약을 나눠 대열을 지어 성 밖으로 나간다 힘
무장한 대대가 흩어지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간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박승환은 해산 소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소식을 들은 시위대 병사들이 무기고를 열고 일본군과 맞서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많은 병사가 전사했고, 대한제국 군대는 그날 해산되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참령
- 대한제국 군대의 영관급 장교 계급
- 정교
- 하사관 계급의 하나
- 시위대
- 황궁과 서울을 지키던 대한제국 중앙 군대
- 진위대
- 지방을 지키던 대한제국 군대
- 조칙
- 황제의 명령을 적은 문서
- 부속 각서
- 조약에 따로 붙인 약속 문서
- 조약
- 일본 통감이 나라 안 일을 쥐게 한 조약
- 훈련원
- 서울의 군사 훈련장
- 부위
- 하급 장교
- 대관정
- 일본군 사령관이 머물던 집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1907년, 훈련원으로 가는 아침.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