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경술국치
1910년 · 개항기·대한제국 · 막기
경술국치 — 흥복헌의 어전회의
한눈에 보기
- 언제
- 1910년 · 대한제국 융희 4년
- 어디서
- 창덕궁과 남산 통감 관저
- 무슨 일
-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가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경술국치).
- 무엇이 문제였나
- 일본은 일주일 동안 이를 숨기고 신문과 모임을 막은 뒤 8월 29일 발표했다. 대한제국은 그렇게 35년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
- 이야기 속 목표
- 나라를 넘기는 조약이 8월 22일 몰래 맺어지고 그대로 넘어가지 않게 만든다
배경: 이미 정해진 결정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1907년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으로 내정과 군대를 빼앗긴 대한제국에는 이름만 남아 있었다. 1909년 7월 6일, 일본 내각은 한국을 병합하기로 비밀리에 결정했다. 그해 10월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12월 4일에는 일본 편에 선 단체 일진회가 나라를 합치자는 ‘합방 청원’을 내걸었지만, 애국계몽 단체들의 거센 반발에 일은 해를 넘겼다.
1909년에는 사법권도 넘어갔고, 1910년 6월에는 경찰권까지 일본에 넘겨졌다. 나라를 지킬 수단이 하나씩 사라진 뒤였다. 남은 것은 황제와 내각이라는 껍데기, 그리고 그것을 없애는 마지막 서류 한 장이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910년 7월 23일, 새 통감과 막힌 신문
1910년 5월 통감으로 임명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7월 23일 서울에 왔다. 그는 육군대신을 겸하던 군인이었다. 그는 그날로 『대한민보』의 발행을 정지시키고 『대한매일신보』의 판매를 금지했다. 소식이 퍼질 통로부터 막은 것이다.
전개 — 8월 16일과 18일, 관저의 협의
8월 16일, 데라우치는 남산의 통감 관저로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불러 조약 초안을 보였다. 8월 18일, 대한제국 내각회의에서 이에 합의했다.
결말 — 8월 22일, 흥복헌의 마지막 어전회의
8월 22일, 헌병들이 거리마다 늘어선 가운데 창덕궁 대조전의 흥복헌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순종은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삼는 위임장을 내렸다. 그날 오후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남산의 통감 관저에서 병합조약에 조인했다.
일본은 그 뒤 일주일 동안 조약 사실을 숨겼다. 단체들의 모임을 막고, 원로 대신들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8월 29일 조약을 공포했다. 이날을 나라가 치욕을 당한 날이라는 뜻에서 경술국치라 부른다. 이날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한반도는 35년 가까이 일본의 식민지로 지냈다.
조약은 무엇을 정했나
병합조약은 여덟 개의 조로 되어 있다. 첫째 조는 한국 황제가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고 적었고, 둘째 조는 일본 황제가 이를 받아들인다고 적었다. 나머지 조항은 황제와 황족의 대우, 병합에 공을 세운 한국인에게 줄 작위와 은금, 일본의 법을 따르는 한국인의 보호 같은 내용이었다.
조약문은 마치 한국 황제가 스스로 원해서 나라를 넘기는 듯한 모양으로 짜여 있었다. 앞서 일진회의 청원을 내세운 것도, 공포 때 황제의 칙유를 함께 낸 것도 같은 뜻이었다. 강제로 빼앗았다는 인상을 지우고 ‘합의’의 모양새를 갖추려 한 것이다.
연표로 보는 다섯 해
- 1905년 11월
- 을사늑약. 외교권을 잃고, 이듬해 통감부가 들어선다.
- 1907년 7월
-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고종이 물러나고, 정미7조약이 맺어진다. 8월에 군대가 해산된다.
- 1909년 7월
- 일본 내각이 병합 방침을 결정하고, 사법권을 넘겨받는 각서가 맺어진다.
- 1909년 10월
-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쏜다.
- 1909년 12월
- 일진회가 ‘합방 청원’을 낸다.
- 1910년 6월
- 경찰권이 일본으로 넘어간다.
- 1910년 7월 23일
- 데라우치 통감이 서울에 오고, 신문들이 막힌다.
- 1910년 8월 22일
- 흥복헌 어전회의와 병합조약 조인.
- 1910년 8월 29일
- 조약 공포. 대한제국이 사라진다.
- 1910년 10월 1일
- 조선총독부가 문을 연다.
주요 인물
- 순종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어전회의에서 위임장을 내렸다. 병합 뒤에는 ‘이왕’으로 격이 낮추어졌다.
- 이완용
- 총리대신. 전권위원으로서 병합조약에 조인했다.
- 조중응
- 농상공부대신. 이완용과 함께 통감 관저에 불려 가 초안을 받았다.
- 윤덕영
- 시종원경. 황실 쪽에서 병합에 관여했다.
- 데라우치 마사타케
-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 조약을 밀어붙였다.
그 뒤에 일어난 일
공포 날, 충청도 금산 군수 홍범식이 나라를 잃은 데 항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라도 구례의 선비 황현은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뒤를 따랐다. 그는 시에서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렵다고 적었다. 그해 겨울에는 이회영 여섯 형제가 집안의 재산을 정리해 서간도로 떠났고, 이듬해 그곳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군을 길러 낼 터전을 닦았다.
10월 1일 통감부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문을 열었다. 총독은 일본 왕에게 직접 속한 군인이 맡았고, 헌병이 경찰 일을 겸하는 무단 통치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부터 토지 조사 사업이 벌어져, 신고하지 못한 땅과 공동으로 쓰던 땅 상당수가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학교에서는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총독을 해치려는 모의를 꾸몄다며 신민회 회원 등 수백 명을 붙잡아, 1심에서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105인 사건이 이어졌다. 국내에서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저항의 길은 거의 막혔고, 독립운동의 중심은 한동안 만주와 연해주, 중국 관내와 미주로 옮겨 갔다.
자주 헷갈리는 점
‘한일합방’이나 ‘한일합병’이라는 말도 쓰이지만, 두 나라가 대등하게 합친 것처럼 들린다는 이유로 지금은 경술국치나 국권 피탈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조약에 조인한 날은 8월 22일이고, 세상에 알린 날이 8월 29일이다. 국치일로 기억하는 것은 뒤의 날이다.
병합조약에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순종이 조약을 알리는 칙유에 서명하지 않았고, 찍힌 도장도 정식 국새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문제는 조약이 처음부터 효력이 없었다는 논의와 이어진다. 다만 학계에서 논쟁 중인 사안이라 이 글에서는 그런 주장이 있다는 정도로만 전한다. 어전회의가 열린 시각을 오후 1시로 적는 자료와 2시로 적는 자료도 있다. 어전회의에서 반대한 대신이 있었다거나, 황후가 옥새를 감추었다가 빼앗겼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경술국치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일주일이다. 조인하고 공포하기까지 일본은 신문을 막고 모임을 막고 사람을 가두었다. 세상이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그래서 지금도 8월 29일을 나라를 잃은 날, 국치일로 기억한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흥복헌을 드나드는 젊은 내관, 정동 선교사 집의 통역 학생, 원로 대신 댁의 겸인(집안일 보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대한제국 융희 4년, 창덕궁과 남산 통감 관저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한 해 전 여름, 일본 정부는 한국을 병합하기로 은밀히 정했다. 겨울에는 일본 편에 선 단체 일진회가 나라를 합치자는 글을 내걸었지만 거센 반발에 일은 해를 넘겼다.
경술년 칠월 스무사흘, 새 통감(일본이 보낸 최고 책임자) 데라우치가 서울에 온다. 그날로 대한민보가 정간(발행 정지)되고 대한매일신보는 판매가 금지된다. 팔월 열엿새, 통감 관저에 총리대신 이완용 등이 불려 간다.
팔월 스무이틀, 헌병(군대 경찰)이 거리마다 늘어선 가운데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어전회의(임금 앞에서 여는 회의)가 열린다. 그날 오후 조약이 조인되고, 세상은 일주일 뒤에야 그것을 안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10년 7월, 정간된 신문사 앞
신문사 문에는 정간 딱지가 붙었고, 거리에는 헌병이 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 사람은 적고, 아는 사람은 입을 다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이름(평판·여론), 재물(물자),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 정동의 외국 기자들과 안면을 튼다 이름
조약 소식을 곧바로 세계에 알릴 줄이 생긴다. - 몰래 찍을 수 있는 작은 인쇄기를 산다 재물
숨긴 소식을 전단으로 장안에 뿌릴 수 있다. - 원로 대신 댁 겸인들과 안부를 주고받는다 사람
원로 대신들의 속마음이 내 귀에 들어온다.
넷째 장 · 전개 — 1910년 8월 중순, 원로 대신들의 사랑방
내각에서는 이미 일이 정해졌다는 말이 돈다. 그러나 원로 대신과 황족들 가운데에는 어전회의에 불려 가면 입을 열 사람이 몇 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 반대 뜻이 있는 원로들의 연명을 받는다 사람
임금 앞에 반대 뜻을 내밀 종이가 생긴다. - 궁내부 문서가 오가는 길을 알아 둔다 정보
위임장이 어디서 막힐 수 있는지 안다. - 궁문 순검들과 안면을 튼다 힘
급할 때 궁 안으로 사람을 들일 수 있다.
다섯째 장 · 전개 — 1910년 8월 21일, 창덕궁
내일 흥복헌에서 어전회의가 열린다. 거리에는 헌병이 열다섯 칸마다 서고, 궁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이름(평판·여론), 정보(지식),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외국 통신원에게 내일 일을 미리 알린다 이름
조약이 맺어지면 그날 바로 세계에 알려진다. - 흥복헌 자리 배치와 위임장 문안을 알아낸다 정보
위임장이 언제 임금 앞에 놓일지 안다. - 인쇄기로 밤새 전단을 찍어 둔다 재물
회의가 끝나자마자 백성이 소식을 안다.
여섯째 장 · 그날 — 1910년 8월 22일 오후, 창덕궁 흥복헌
대신들과 원로들이 임금 앞에 둘러앉았다. 이완용에게 전권을 맡긴다는 위임장이 임금 앞에 놓인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원로들의 연명을 회의 자리에 들여보낸다 사람
임금이 위임장을 물려 조약이 그날 맺어지지 않는다. - 그날 밤 외국 통신원에게 조인 소식을 넘긴다 이름
숨기려던 조약이 하루 만에 세계에 알려진다. - 어보가 찍히기 전 문서의 빈틈을 임금 곁에 알린다 정보
임금의 도장이 찍히지 않아 조약이 멈춘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어전회의에서 이완용에게 전권 위임장이 내려졌고, 그날 오후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병합조약에 조인했다. 일본은 일주일 동안 이를 숨기고 집회를 막은 뒤 8월 29일 공포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병합
- 한 나라를 다른 나라에 합쳐 없앰
- 일진회
- 일본 편에 서서 병합을 주장한 단체
- 위임장
- 어떤 일을 맡긴다는 뜻을 적은 문서
- 공포
- 법이나 조약을 세상에 널리 알림
- 연금
-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둠
- 각의
- 내각의 회의
- 칙유
-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글
- 양여
- 넘겨줌
- 통감
- 일본이 보낸 최고 책임자
- 정간
- 발행 정지
- 헌병
- 군대 경찰
- 어전회의
- 임금 앞에서 여는 회의
- 겸인
- 집안일 보는 사람
- 어보
- 나라 도장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1910년, 흥복헌의 어전회의.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