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을사늑약
1905년 · 개항기·대한제국 · 막기
을사늑약 — 중명전의 밤
한눈에 보기
- 언제
- 1905년 · 대한제국 광무 9년
- 어디서
- 경운궁 중명전과 외부 청사
- 무슨 일
-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군대로 궁궐을 둘러싸고 대한제국에 조약을 강요했다(을사늑약).
- 무엇이 문제였나
- 외부대신 도장이 찍히며 대한제국은 다른 나라와 외교할 권리를 빼앗겼다. 이듬해 일본 통감부가 섰고, 5년 뒤 나라를 잃었다.
- 이야기 속 목표
- 외교를 맡은 대신의 도장(직인)이 조약문에 찍히지 않게 해 외교권을 지킨다
배경: 러일전쟁과 열강의 묵인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다. 그해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 정부 안에 일본이 추천한 고문을 두게 했다. 재정 고문 메가타와 외교 고문 스티븐스가 이때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전쟁에서 이겼고,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에게서, 8월 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에게서, 9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에게서 한국을 차지해도 좋다는 묵인을 얻었다.
고종은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10월, 그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에게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내는 친서를 맡겼다. 1882년 조미조약에 들어 있던 거중조정 조항에 기대를 건 것이다. 그러나 헐버트가 워싱턴에 닿았을 때 서울에서는 이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1월 9일부터 16일까지, 이토의 방문
11월 9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왔다. 그는 10일 고종을 만나 일왕의 친서를 전했고, 15일 협약 초안을 내밀었다. 고종은 대신들과 의논해야 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16일 이토는 정동의 손탁호텔로 대신들을 불러 설득했다.
전개 — 11월 17일, 포위된 궁궐
17일 오후,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대신들을 공사관에 모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고, 자리는 궁으로 옮겨졌다. 경운궁 중명전에서 열린 어전회의는 협약을 거부하기로 했다. 그 시각 일본군은 궁궐 안팎을 둘러싸고 있었다. 밤이 되자 이토와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들어와 대신들에게 한 사람씩 찬반을 물었다.
결말 — 11월 18일 새벽, 외부대신의 직인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강하게 반대했고,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 뜻을 밝혔다. 이하영의 반대가 얼마나 단호했는지는 자료마다 조금 다르게 적는다. 한규설은 고종에게 가려다 쓰러졌다고도, 별실에 갇혔다고도 전한다.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찬성했다. 이토는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는 문구를 더하는 등 조약문을 고쳤고, 18일 새벽 1시 무렵 외부대신의 직인이 찍혔다. 고종은 끝내 재가하지 않았다.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렸다.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는 뜻의 글이다. 22일 고종은 헐버트에게 조약이 무효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25일 무렵 미국 국무장관 루트는 개입을 거절했다. 30일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조병세와 홍만식 등이 뒤를 따랐다.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문을 열었다.
조약에 무엇이 적혔나
조약문은 다섯 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다. 줄이면 이렇다. 앞으로 한국이 다른 나라와 맺는 관계는 일본 외무성이 맡아 처리한다. 한국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의 조약이나 약속을 맺지 못한다. 일본은 서울에 통감 한 사람을 두어 외교에 관한 일을 관리하게 한다. 이전에 맺은 조약은 이 협약과 어긋나지 않는 한 그대로 둔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지킨다.
마지막 조항이 바로 그 밤에 이토가 더해 넣은 문구로 알려져 있다. 황제의 걱정을 덜어 주는 듯한 모양새를 갖추어 반대를 누그러뜨리려 한 것이다. 겉으로는 ‘외교만’ 넘기는 조약이었지만, 통감은 곧 외교를 넘어 내정 전반에 손을 뻗었다.
주요 인물
- 고종
- 대한제국 황제. 조약을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고, 밀사와 전보로 무효를 알리려 했다.
- 이토 히로부미
- 일본 특파대사. 조약을 밀어붙였고, 뒤에 초대 통감이 되었다.
-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 조약에 반대한 대신들.
-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 조약에 찬성한 다섯 대신. 을사오적이라 불린다.
- 민영환
- 시종무관장. 조약에 항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장지연
- 『황성신문』 주필.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
- 헐버트
-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으로 간 선교사.
그 뒤에 일어난 일
조약이 알려지자 반대 상소가 잇따랐고, 1906년 봄부터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전 참판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했고, 최익현은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쓰시마로 보내져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상도에서는 평민 출신 신돌석이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외국 공사관들이 서울을 떠나면서 대한제국은 나라 밖에 억울함을 호소할 길을 잃었다. 고종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낸 것은 이 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 일을 구실로 고종을 물러나게 했고, 같은 해 정미 7조약과 군대 해산, 1910년 경술국치가 차례로 뒤따랐다. 모두 1905년 11월의 그 밤에서 이어진 일이다.
무효를 둘러싼 논쟁
‘을사늑약’은 억지로 맺어진 조약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공식으로는 한일협상조약 또는 제2차 한일협약이라 부르는데, 조약문 첫머리에 정작 조약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황제의 재가가 없었고, 군대가 궁궐을 둘러싼 가운데 대신들에게 하나씩 찬반을 물었으며, 조약문에 이름조차 없다는 점은 이 조약이 처음부터 무효라는 주장의 근거로 쓰인다. 외부의 직인을 일본 측이 가져와 찍었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지만, 경위는 원자료로 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은 1910년 이전에 맺은 조약들이 ‘이미 무효’라고 적었는데,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였다는 뜻으로, 일본은 한때는 유효했으나 뒤에 효력을 잃었다는 뜻으로 읽어 왔다. 같은 문장을 두 나라가 다르게 해석하는 셈이다.
자주 헷갈리는 점
을사오적은 찬성한 다섯 대신을 가리키는 말이지, 조약문에 이름을 쓴 사람의 목록이 아니다. 조약문에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이름만 들어간다. 가쓰라-태프트 밀약도 두 나라가 정식으로 서명한 조약이 아니라,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기록이다. 그래도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한 흐름을 보여 주는 자료로 자주 인용된다.
조약이 맺어진 경운궁 중명전은 지금도 덕수궁 돌담 바깥 정동에 남아 있다. 원래는 황실 도서관으로 지은 서양식 건물이고, 지금은 을사늑약의 경위를 보여 주는 전시관으로 쓰인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중명전의 숙직 내관, 외부의 젊은 주사, 시종무관부의 하급 무관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대한제국 광무 9년, 경운궁 중명전과 외부 청사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을사년 가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미국·영국·러시아와 차례로 약속을 맺어, 한국을 차지해도 좋다는 묵인을 얻었다. 고종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에게 미국 대통령 앞 친서를 맡긴다.
11월 9일,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들어온다. 15일 협약 초안을 내밀고, 16일에는 손탁호텔(정동의 서양식 호텔)로 대신들을 불러 설득한다.
11월 17일, 일본군이 궁궐 안팎을 둘러싼 가운데 어전회의(황제 앞 대신 회의)가 열린다. 그 밤 대신들은 하나씩 찬반을 질문받고, 18일 새벽 외부대신(외교 담당 장관)의 직인(공식 도장)이 찍힌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05년 10월, 헐버트가 떠나기 전
고종이 헐버트에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앞 친서를 맡겼다. 일본은 전신을 검열하고, 서울의 소식은 일본을 거쳐서만 바깥으로 나간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제물포 전보사 기수와 친해져 우회 발신 길을 찾는다 정보
일본 검열을 피해 바깥에 소식을 보낼 길이 생긴다. - 한규설·민영기 대감의 측근과 가까워진다 사람
반대하는 대신들의 속마음을 듣게 된다. - 헐버트의 워싱턴 활동비를 모은다 재물
미국에서 황제의 뜻을 알릴 돈이 생긴다.
넷째 장 · 전개 — 1905년 11월 10일, 이토가 고종을 알현한 날
이토가 일왕의 친서를 바쳤다. 며칠 안에 협약 초안을 내밀 거라는 말이 돈다. 대신들의 집 앞에 낯선 인력거가 자주 선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힘(무력·조직),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반대 성향 대신들에게 공동 사직 서약을 받으러 다닌다 사람
반대 대신들이 서로 믿고 함께 버틴다. - 시종무관부 무관들과 궁 안 연락망을 만든다 힘
어느 문이 막혀도 소식이 황제께 닿는다. - 『황성신문』에 재가 없는 협약은 무효라는 논설을 싣게 한다 이름
"황제 허락 없는 조약은 무효"가 상식이 된다.
다섯째 장 · 전개 — 1905년 11월 16일, 손탁호텔
이토가 손탁호텔로 대신들을 불렀다. 문밖에서는 일본 헌병이 오가고, 안에서는 웃음소리와 고함이 번갈아 새어 나온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외부 직인 보관 규칙과 담당자를 확인해 둔다 정보
도장을 함부로 못 꺼내게 할 근거가 생긴다. - 직인 궤를 지킬 주사와 무관 둘을 미리 정한다 힘
그 밤 도장 상자 곁을 지킬 사람이 생긴다. - 손탁호텔 앞 모습을 베델에게 알려 기사로 남긴다 이름
일본의 위협이 외국 공사관에 알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905년 11월 17일 밤, 경운궁 중명전
어전회의는 거부로 끝났지만 이토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대신들을 하나씩 부르려 한다. 대신들의 우두머리인 참정대신 한규설이 고종께 가려다 막혔다는 말이 복도에 돈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반대 대신들에게 공동 사직 서약을 꺼내 들게 한다 사람
반대가 다수로 남아 조약이 맺어지지 못한다. - 궁궐 포위와 황제의 거부를 담은 전보를 우회로로 띄운다 정보
강제 조약이라는 사실이 세계에 먼저 알려진다. - 외부 직인 궤를 지키며 그날 밤 반출을 거부한다 힘
도장 없는 조약문만 남아 효력을 잃는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1월 18일 새벽 외부대신 직인이 찍혔다. 한규설·민영기·이하영은 반대했고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은 찬성했으며, 고종은 끝내 재가하지 않았다. 이듬해 통감부가 섰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늑약
- 억지로 맺은 조약
- 재가
- 임금이 결재해 허락함
- 통감부
-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을 감독하려 세운 기관
- 거중조정
- 조약을 맺은 나라가 다른 나라와 분쟁이 있을 때 사이에서 돕기로 한 조항
- 참정대신
- 의정부의 실무를 이끄는 대신
- 외부
- 대한제국에서 외교를 맡은 관청
- 손탁호텔
- 정동의 서양식 호텔
- 어전회의
- 황제 앞 대신 회의
- 외부대신
- 외교 담당 장관
- 직인
- 공식 도장
- 중명전
- 경운궁 안 서양식 전각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1905년, 중명전의 밤.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