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안중근의 옥중 투쟁과 동양평화론

1910년 · 개항기·대한제국 · 막기

안중근의 옥중 투쟁과 동양평화론 — 뤼순 옥중의 원고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1910년 · 대한제국 융희 4년
어디서
뤼순 관동도독부 법원과 뤼순 감옥
무슨 일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안중근 의거). 일본은 뤼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1910년 3월 26일 집행했다.
무엇이 문제였나
글을 마칠 때까지 미뤄 준다던 약속은 깨져 『동양평화론』은 앞부분에서 멈췄다. 유해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해 지금도 묻힌 곳을 모른다.
이야기 속 목표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끝까지 쓰게 하고, 묻힌 자리를 기록해 유해가 고국에 돌아오게 한다

배경: 하얼빈역 이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하얼빈역 일대는 러시아가 관리하던 철도 부속지였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러시아 군경에게 붙잡혔고, 곧 일본 측에 넘겨져 일본이 다스리던 중국 땅 뤼순으로 옮겨졌다. 10월 30일부터 신문이 시작되었고, 11월 3일부터 뤼순 감옥에 갇혔다. 다섯 달 동안 그는 열한 차례 신문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토를 쏜 까닭을 밝히고, 한국과 청나라와 일본이 함께 사는 길을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을 개인의 원한으로 사람을 죽인 범죄자가 아니라 대한의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싸운 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러니 전쟁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와 영국의 변호사가 변론을 맡겠다고 나섰고 한국인 변호사도 뤼순까지 찾아갔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인 관선 변호인만 세웠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910년 2월, 공판과 선고

1910년 2월 7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렸고, 2월 14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재판은 일주일 사이 여섯 번 열린 것으로 정리된다. 어머니 조마리아는 항소하지 말라는 뜻을 아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안중근은 감옥에서 이미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쓰고 있었다. 응칠은 그의 아명이다.

전개 — 고등법원장과의 면담

안중근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우지히토를 만나, 『동양평화론』을 마칠 수 있게 형 집행을 한 달쯤 미뤄 달라고 청했다. 이 면담을 적은 청취서에는 2월 17일이라는 날짜가 붙어 있지만, 면담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확인이 더 필요하다. 안중근 쪽 기록에 따르면 법원장은 몇 달이 걸려도 좋다는 뜻으로 답했다. 이 약속을 믿고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3월 15일 무렵 『안응칠 역사』를 마친 그는 곧 『동양평화론』에 붓을 들었다.

결말 — 1910년 3월 26일 오전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3월 26일 오전, 사형이 집행되었다.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둘째 편 전감의 일부만 쓰인 채 멈췄다. 뒤를 이을 현상, 복선, 문답 편은 비어 있다.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은 형의 유해를 돌려 달라고 했지만 일본 측은 내주지 않고 감옥 묘지에 묻었다. 그 자리를 적은 기록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은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표로 보는 뤼순의 다섯 달

『동양평화론』에는 무엇이 담겼나

안중근이 계획한 『동양평화론』은 서문, 전감, 현상, 복선, 문답의 다섯 편이었다. 서문에서 그는 서양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오는 때에 한국, 청, 일본이 서로 다투지 말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썼다. 전감에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돌아보며, 일본이 러시아와 싸울 때 동양 사람들이 일본을 응원한 것은 동양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일본이 그 뒤 한국의 국권을 빼앗아 그 믿음을 저버렸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었다.

원고로 남지 못한 구상은 고등법원장과의 면담을 적은 청취서에 일부가 전한다. 뤼순을 세 나라가 함께 관리하는 곳으로 만들어 그곳에 평화 회의를 두고, 세 나라가 함께 쓰는 은행과 화폐를 만들며, 세 나라의 젊은이로 군대를 꾸리자는 내용이었다고 정리된다. 백 년도 더 전에 나온 이 생각은 오늘날의 지역 협력 구상과 견주어 이야기되곤 한다.

주요 인물

안중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뤼순 감옥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썼다.
조마리아
안중근의 어머니. 항소하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안정근과 안공근
안중근의 동생들. 면회를 다니고 유해를 돌려 달라고 청했다.
히라이시 우지히토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 안중근의 말을 청취서로 남겼고, 집행을 미뤄 주겠다고 답했다고 전한다.
미조부치 다카오
안중근을 신문한 검찰관.
빌렘 신부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프랑스 신부. 3월 초 뤼순으로 와 면회하고 성사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

감옥에서 안중근은 많은 유묵을 남겼다. 붓글씨 끝에는 ‘대한국인 안중근’이라는 글자와 함께 넷째 손가락 한 마디가 짧은 손도장을 찍었다. 그는 1909년 초 동지들과 손가락을 끊어 독립을 맹세한 일이 있었다. 남은 유묵 여럿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글씨를 받은 일본인 간수도 있었다.

서울 남산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고, 중국 하얼빈역에도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뤼순의 옛 감옥 건물도 박물관으로 남아 그가 갇혔던 곳을 보여 준다.

더 알아 둘 점

유해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08년 한국과 중국이 뤼순 감옥 뒤편 위안바오산 일대를 함께 발굴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서울 효창공원에는 안중근의 유해를 모실 날을 기다리는 빈 무덤, 가묘가 있다. 법원장의 약속은 안중근 쪽 기록에 근거한 것이어서, 그 말이 정확히 어떻게 오갔는지는 지금도 확인이 어렵다.

하얼빈의 총성이 그 사상의 끝이 아니라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뤼순의 다섯 달은 의거만큼 중요하게 기억된다. 그는 법정과 감옥에서도 자신이 왜 싸웠는지를 말과 글로 남기려 했고, 그 기록이 오늘날 그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신문 조서와 공판 기록, 『안응칠 역사』, 남은 『동양평화론』은 모두 한 사람이 자기 행동의 까닭을 끝까지 설명하려 한 흔적이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뤼순 감옥의 젊은 간수, 공판을 취재하러 온 신문 기자, 안정근 형제와 동행한 진남포 상인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대한제국 융희 4년, 뤼순 관동도독부 법원과 뤼순 감옥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쏜 뒤, 안중근은 일본이 다스리던 중국 땅 뤼순으로 넘겨졌다. 다섯 달 동안 열한 차례 신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한국과 청과 일본이 함께 사는 길을 이야기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선고된다. 안중근은 일본인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동양평화론』(한·중·일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길을 쓴 글)을 마칠 때까지 집행을 미뤄 달라 청하고, 그러겠다는 답을 믿고 항소를 하지 않는다. 3월 중순, 자서전을 마친 그는 동양평화론의 붓을 든다.

3월 26일 오전, 약속과 달리 사형이 집행된다. 원고는 서문과 앞부분에서 멈추고, 유해는 동생들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어딘가에 묻힌다. 그 자리는 지금도 모른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910년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선고가 끝나자 방청석이 술렁였다. 안중근은 담담했고, 동생 정근과 공근은 법정 밖에서 오래 서 있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1910년 2월 중순, 고등법원장 면담

안중근이 고등법원장을 만나 동양평화론을 마칠 때까지 집행을 미뤄 달라 청했다. 법원장은 그러겠다고 답했다지만, 그 말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1910년 3월 중순, 뤼순 감옥

자서전을 마친 그가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쓰기 시작했다. 감옥 뒤 언덕에는 수감자들이 묻히는 묘지가 있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재물(물자),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1910년 3월 25일 밤, 뤼순 감옥

내일 아침 집행한다는 말이 돌았다. 원고는 아직 서문과 앞부분뿐이고, 동생들은 유해를 달라는 청원서를 손에 쥐고 있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사형이 집행되었다.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앞부분만 남았고, 유해는 동생들에게 넘겨지지 않은 채 묻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관동도독부
일본이 랴오둥반도 남쪽을 다스리려 둔 관청
뤼순
랴오둥반도 끝의 항구 도시
청취서
법원장이 안중근의 말을 듣고 적은 기록
전감
『동양평화론』의 둘째 편. 앞선 역사의 교훈이라는 뜻
유묵
죽은 사람이 남긴 글씨
관선 변호인
법원이 정해 준 변호인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1910년, 뤼순 옥중의 원고.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