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서희의 외교 담판

993년 · 고려 · 앞당기기

서희의 외교 담판 — 말로 지킨 땅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993년 · 고려 성종 12년
어디서
안북부와 서경
무슨 일
993년, 거란 장수 소손녕이 고려를 쳐들어왔다. 서희는 적진에 가서 말로 담판해 거란군을 돌려보내고 땅(강동 6주)까지 얻었다(서희의 외교 담판).
왜 앞당기나
담판 전에 성 하나가 무너지고 장수가 붙잡혔으며, 겁먹은 조정은 창고 쌀을 강에 버리게 했다. 담판이 빠를수록 이런 손해가 줄어든다.
이야기 속 목표
"땅을 떼어 주자"는 주장을 더 빨리 꺾고, 서희의 담판을 앞당긴다

배경: 북쪽으로 나아가는 고려와 거란

거란은 926년 발해를 무너뜨리고 만주의 강자가 되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었다는 뜻을 나라 이름에 담고, 북쪽으로 땅을 넓히며 중국의 송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았다. 송과 맞서던 거란에게 이런 고려는 신경이 쓰이는 이웃이었다. 거란은 송을 치기 전에, 고려가 송과 손잡고 자기를 뒤에서 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덜어야 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993년 가을, 북계의 세 군대

993년, 여진이 거란이 쳐들어오려 한다고 미리 알려 왔지만 조정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해 가을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고려 성종은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쪽 국경 지역인 북계로 보내고, 자신은 안북부, 지금의 안주까지 나아갔다.

전개 — 993년 10월, 봉산군 함락과 서경의 회의

10월, 소손녕이 봉산군을 깨뜨렸고 앞장섰던 고려 장수 윤서안이 붙잡혔다. 성종은 서경, 지금의 평양으로 물러났다. 소손녕은 80만 대군이라 큰소리치며 항복을 재촉했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말과 서경 북쪽 땅을 떼어 주자는 할지론이 힘을 얻었다. 성종은 할지론을 따르려고 서경 창고의 쌀을 백성에게 나눠 주고 남은 것은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서희는 이에 반대했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싸움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틈을 잘 타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땅을 떼어 주는 것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 된다고도 했다. 이지백도 서희와 뜻을 같이해, 땅을 내주기보다 나라의 옛 풍속과 의례를 되살려 민심을 모으자고 했다.

결말 — 993년 윤10월, 안융진과 담판

윤10월, 소손녕은 청천강 가까운 안융진을 쳤다가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에게 막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항복을 재촉했다. 서희가 국서를 들고 거란 진영으로 갔다. 소손녕이 뜰에서 절하라고 하자 서희는 뜰 아래에서 절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예이니 두 나라의 대신이 만나는 자리에서는 맞지 않다며 거부했고, 두 사람은 대등한 예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은 거란이 군사를 낸 까닭을 두 가지로 댔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옛 땅은 거란의 것인데 고려가 그 땅을 침범했다는 것, 그리고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긴다는 것이었다.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왕래하면 무사하리라고 했다.

서희는 하나씩 받아쳤다.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기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두었으며, 땅의 경계로 따지면 거란의 동경도 옛 고구려 땅에 들어 있다고 했다. 압록강 안팎도 본래 고려의 땅인데, 여진이 그 사이를 막고 있어 거란과 오가지 못한다고 했다. 여진을 몰아내고 옛 땅을 돌려받아 성을 쌓고 길을 열면 어찌 왕래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거란의 진짜 목적이 땅이 아니라 고려와 국교를 맺는 데 있음을 읽은 말이었다. 소손녕은 이를 거란 황제에게 아뢰고 군사를 거두었다.

그날까지 잃은 것

담판은 윤10월에야 열렸다. 그 전까지 봉산군이 무너지고 윤서안과 선봉 군사들이 붙잡혔으며, 서경 창고의 쌀을 강에 버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땅을 떼어 주자는 말에 서북 지방의 민심도 흔들렸다. 서희가 읽은 거란의 속뜻이 조정에서 더 일찍 받아들여졌다면, 쌀은 강에 버려지지 않고 담판도 더 일찍 열렸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앞당기기’로 쓰인 까닭이다.

담판이 남긴 것과 그 대가

담판의 열매는 강동 6주였다. 고려는 994년부터 3년 동안 서희를 앞세워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에 성을 쌓았다. 고려의 국경이 처음으로 압록강 가까이 닿았고, 이 성들은 뒤에 거란의 대군을 막는 방패가 되었다.

공짜는 아니었다. 고려는 994년부터 거란의 연호를 쓰고 거란과 사신을 주고받기로 했으며, 송과의 공식 관계는 끊었다. 겉으로는 거란을 섬기는 모양새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땅과 평화를 얻은 셈이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송과의 교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서희의 담판이 높이 평가받는 까닭은 말솜씨만이 아니라,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지킬지를 정확히 가렸다는 데 있다.

연표

주요 인물

서희
고려의 중군사(942~998). 젊어서 송에 사신으로 가 예를 지켜 이름을 얻었다. 할지론에 반대하고, 거란 진영에서 담판으로 군대를 돌려보냈다.
성종
고려의 왕. 안북부까지 나아갔다가 서경으로 물러났다.
이지백
할지론에 반대해 서희와 뜻을 같이한 신하.
대도수와 유방
안융진에서 거란군을 막아 낸 고려의 장수들. 대도수는 발해 왕족의 후예로 전한다.
윤서안
봉산군에서 사로잡힌 고려의 선봉 장수.
소손녕
거란의 동경유수. 고려를 치고 서희와 담판했다.

자주 헷갈리는 점

서희가 말 한마디로 대군을 돌려보냈다고 기억하기 쉽지만, 담판 앞에는 안융진의 승리가 있었다. 거란군이 쉽게 내려올 수 없다는 사실이 서희의 말에 무게를 실었다. 또 소손녕이 말한 80만 대군은 큰소리였고, 학계에서는 실제 병력을 6만 안팎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진이 경고한 시기와 강에 버린 쌀의 양 같은 세부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전한다. 『고려사』 서희전은 서희가 거란 진영에 이레 동안 머물렀고, 소손녕이 낙타와 말, 양, 비단 같은 예물을 주어 보냈다고 적는다.

서희의 담판은 싸우지 않고 땅을 지키고, 오히려 넓힌 외교의 본보기로 꼽힌다. 그러나 이때 얻은 강동 6주는 뒤에 거란이 돌려 달라고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오는 빌미가 되었고, 1010년의 2차 침입과 1019년의 귀주대첩으로 이어진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앞당기기’ 이야기다. 나는 중군사 서희 본인으로 깨어난다. 송에 사신으로 가 예를 지켜 이름을 얻었다. 소손녕이 정말 바라는 것이 땅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으니, 준비와 사람과 정보로 그날을 더 일찍 오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고려 성종 12년, 안북부와 서경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린 지 예순여 해, 고려는 북쪽으로 땅을 넓히며 송과 사신을 주고받는다. 993년 가을, 거란 장수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

고려 성종은 박양유·서희·최량에게 세 군대를 맡겨 북계(고려 북쪽 국경 지역)로 보내고, 스스로 안북부(지금의 안주)까지 나아갔다. 소손녕은 팔십만 대군이라 큰소리치며 항복하라 한다.

시월, 봉산군이 무너지고 앞장선 장수 윤서안이 붙잡힌다. 서경(지금의 평양)에서는 땅을 떼어 주자는 말(할지론)이 힘을 얻고, 창고 쌀을 강에 버리라는 영까지 내린다. 담판은 그 뒤에야 열린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나는 안다. 더 일찍 올 수도 있다.

셋째 장 · 발단 — 993년 가을, 북계로 가는 길

세 군이 북계로 올라간다. 여진 사람들이 거란의 움직임을 전해 오지만, 진중에서는 반신반의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993년 10월, 서경 어전회의

봉산군이 무너지고 윤서안이 사로잡혔다. 성종은 서경으로 물러났고, 신하들은 항복하자, 서경 이북을 떼어 주자 하며 갈린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이름(평판·여론),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993년 10월 하순, 서경을 떠나기 전

성종이 할지론을 거두었다. 소손녕은 여전히 항복만 재촉하고, 안융진(청천강 가까운 고려의 군사 기지) 쪽으로 군사를 옮긴다. 나는 국서(임금의 공식 편지)를 들고 먼저 가겠다고 청하려 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이름(평판·여론),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993년 10월 하순, 소손녕의 진영

나는 국서를 들고 소손녕의 진영에 닿았다. 안융진에 거란 깃발이 오르기 전이다. 뜰에서 절하라는 말이 먼저 들려온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993년 윤10월, 소손녕은 안융진에서 대도수에게 막힌 뒤에야 담판에 나섰다. 그때까지 봉산군이 무너지고 윤서안이 붙잡혔으며, 서경 창고의 쌀을 강에 버리라는 영이 내려졌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할지론
땅을 떼어 주고 화해하자는 주장
상군사·중군사·하군사
세 갈래 군대의 지휘관
동경유수
거란 동쪽 수도를 맡은 장관
강동 6주
압록강 동쪽에 쌓은 여섯 고을. 흥화진·용주·통주·철주·귀주·곽주
조빙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고 왕래하는 일
연호
왕조가 해를 세는 이름
북계
고려 북쪽 국경 지역
안북부
지금의 안주
서경
지금의 평양
안융진
청천강 가까운 고려의 군사 기지
국서
임금의 공식 편지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993년, 말로 지킨 땅.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