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귀주대첩
1018년 · 고려 · 앞당기기
귀주대첩 — 귀주 동쪽 들판
한눈에 보기
- 언제
- 1018년 · 고려 현종 9년
- 어디서
- 흥화진에서 귀주까지
- 무슨 일
- 1018년 12월,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군사로 고려를 쳤다. 강감찬은 이듬해 2월 귀주 들판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귀주대첩).
- 왜 앞당기나
- 승리 전까지 거란군은 개경 백 리 앞까지 내려왔고, 백성은 집과 들판을 비우고 성으로 숨어야 했다. 빨리 이길수록 피해가 줄어든다.
- 이야기 속 목표
- 거란군이 도읍 개경 가까이 내려오기 전에 귀주의 승리를 앞당긴다
배경: 8년 전의 상처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란해야 했다. 거란은 현종이 직접 와서 예를 올리는 친조를 조건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고려는 그 뒤 현종의 친조도, 서희가 얻은 강동 6주를 돌려달라는 요구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란은 다시 군대를 보낼 구실을 찾고 있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018년 12월, 소배압의 10만 군사
1018년 12월,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는 일흔한 살의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300명의 군사로 영주에 진을 쳤다.
전개 — 흥화진에서 개경 백 리 앞까지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기병 1만 2천을 산골짜기에 숨겼다. 그리고 쇠가죽을 굵은 줄로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 두었다가, 거란군이 건널 때 터뜨리고 숨겨 둔 군사로 쳤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꺾인 소배압은 싸움을 피해 곧장 개경으로 내려갔다. 강민첨이 자주 내구산에서, 시랑 조원이 마탄에서 그 뒤를 쫓아 쳤다.
1019년 정월, 소배압은 개경에서 100리 떨어진 신은현에 이르렀다. 현종은 성 밖의 백성을 성안으로 들이고 들판을 비웠다. 적이 먹을 것도 쉴 곳도 얻지 못하게 한 것이다. 소배압은 기병 300을 금교역으로 보내 살피게 했지만, 이들은 고려군의 밤 습격에 모두 잃었다. 소배압은 군사를 돌렸다.
결말 — 1019년 2월 1일, 귀주 동쪽 들판
돌아가던 거란군은 연주와 위주에서 다시 꺾였다. 2월 1일, 거란군이 귀주를 지날 때 강감찬이 동쪽 들판에서 맞섰다. 싸움이 팽팽하던 때 병마판관 김종현의 군사가 닿았다. 『고려사』 강감찬전에 따르면 그때 남쪽에서 비바람이 불어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고려군은 그 기세를 타고 거란군을 석천을 건너 반령까지 쫓았다.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오는 강감찬을 영파역에서 맞이하며 그의 머리에 금꽃 여덟 가지를 꽂아 주었다.
그날까지 잃은 것
귀주의 싸움은 2월 1일에야 벌어졌다. 그 전까지 거란군은 자주에서 신은현까지 두 달 가까이 서북 지방과 서해도의 고을을 휘저었다. 개경 밖의 마을과 들판은 적을 막으려 스스로 비워야 했다. 흥화진 뒤 남쪽으로 내달린 거란군의 길목을 더 일찍 막았다면 결전도 그만큼 앞당겨졌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앞당기기’로 쓰인 까닭이다.
숫자로 보는 귀주대첩
아래 숫자는 모두 『고려사』에 적힌 것이다. 옛 사서의 군사 수는 부풀려졌을 수 있어 그대로 믿기보다 규모를 가늠하는 정도로 읽는 것이 좋다.
- 10만
- 소배압이 이끌고 온 거란군의 수.
- 20만 8,300
- 강감찬이 영주에 모은 고려군의 수. 지킬 땅이 넓어 군사를 여러 길목에 나누어 두어야 했다.
- 1만 2천
- 흥화진에서 산골짜기에 숨겨 둔 기병의 수.
- 100리
- 거란군이 닿은 신은현에서 개경까지의 거리.
- 300
- 소배압이 금교역으로 보냈다가 밤 습격에 잃은 기병의 수.
- 수천
- 귀주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 『고려사』는 겨우 수천이었다고 적는다.
강감찬이라는 사람
강감찬은 948년에 태어나 983년 과거에서 으뜸으로 뽑힌 문신이다. 칼을 든 무장이 아니라 글을 하는 관리였던 그가 이름을 크게 얻은 것은 1010년 2차 침입 때였다. 개경이 위태롭자 신하들 사이에서 항복하자는 말이 나왔는데, 강감찬은 항복을 반대하고 왕이 잠시 피했다가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현종은 그 말을 따라 남쪽으로 피했고, 고려는 무너지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은 그가 몸집이 작고 생김새가 볼품없었으며 옷차림도 허름해 보통 사람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고 적었다. 겉모습과 달리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앞에 섰던 사람이다.
그 뒤 8년, 다시 거란이 왔을 때 현종은 일흔이 넘은 그에게 군대 전체를 맡겼다. 귀주의 승리 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여러 번 청했고, 1031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태어난 서울 관악구의 집터에는 큰 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낙성대라는 이름이 붙었고, 지금은 그를 기리는 사당과 공원이 있다.
주요 인물
- 강감찬
- 고려의 상원수. 일흔한 살에 흥화진과 귀주에서 거란군을 무찔렀다.
- 강민첨
- 부원수. 자주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쫓아 쳤다.
- 김종현
- 병마판관. 귀주 싸움이 팽팽할 때 군사를 이끌고 닿았다.
- 조원
- 시랑. 마탄에서 거란군을 쳤다.
- 현종
- 고려의 왕. 8년 전 나주까지 피란했고, 이번에는 개경을 지켜 냈다.
- 소배압
- 거란군을 이끈 장수. 귀주에서 크게 졌다.
더 알아 둘 점
귀주대첩은 26년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마무리한 싸움이다. 993년 1차 침입 때는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해 군사를 물리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얻었다. 1010년 2차 침입 때는 개경이 무너졌지만,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 등이 물러가는 거란군의 뒤를 치며 붙잡혀 가던 백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1018년 3차 침입을 귀주에서 끝냈다. 말과 성, 들판의 싸움이 차례로 이어진 셈이다.
흥화진에서 쇠가죽으로 물을 막았다가 터뜨렸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나오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 두고는 이견도 있다. 귀주대첩의 날짜는 『고려사』에 현종 10년(1019) 2월 초하루로 적혀 있다. 귀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이다. 백과사전은 이 싸움을 구주대첩이라는 이름으로도 싣는다.
그 뒤 — 백 년의 균형
귀주대첩 뒤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크게 치지 못했고, 두 나라는 이듬해부터 다시 사신을 주고받으며 화의를 맺었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등 형식으로는 거란을 높였지만, 거란이 끝까지 요구한 왕의 친조와 강동 6주는 내주지 않았다. 싸움에서 이긴 뒤에 맺은 화의였기에 얻을 것은 얻은 셈이다. 그 뒤 12세기 초 여진이 금을 세워 거란을 무너뜨릴 때까지,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서로 크게 넘보지 못하는 힘의 균형이 이어졌다.
고려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방어를 다졌다.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 둘레에 나성을 쌓아 1029년에 마쳤고, 1033년부터는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앞당기기’ 이야기다. 나는 상원수 강감찬 본인으로 깨어난다. 키가 작고 옷차림이 수수하지만, 이십만 군사가 내 말 한마디를 기다린다. 소배압이 어느 길로 내려갈지도 나는 안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으니, 준비와 사람과 정보로 그날을 더 일찍 오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고려 현종 9년, 흥화진에서 귀주까지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팔 년 전 거란의 두 번째 침입 때 개경이 불타고 임금은 나주까지 피란했다. 그 뒤로 고려는 임금이 거란에 가서 절하라는 요구도, 강동 육주(압록강 동쪽 여섯 고을)를 내놓으라는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018년 십이월, 거란 장수 소배압이 십만 군사를 이끌고 다시 압록강을 건넌다. 일흔한 살의 강감찬이 상원수(총사령관), 강민첨이 부사령관이 되어 이십만 팔천삼백 군사로 영주에 진을 친다.
거란군은 흥화진(압록강 가까운 고려의 성)에서 꺾이고도 싸움을 피해 개경 백 리(약 40km) 앞까지 내려간다. 귀주 동쪽 들판의 그날은 이듬해 이월 초하루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나는 안다. 더 일찍 올 수도 있다.
셋째 장 · 발단 — 1018년 12월, 영주 진영
이십만 군사가 영주에 모였다. 장수들은 흥화진 앞에서 거란군을 맞을 채비를 서두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쇠가죽으로 흥화진 냇물을 막을 채비를 서두른다 힘
막은 물을 터뜨려 적을 휩쓸고 숨은 기병으로 친다. - 강민첨·김종현과 남쪽 길목을 나눠 맡는다 사람
적이 남쪽으로 빠져도 길목마다 막을 장수가 있다. - 남하 길목 고을의 곡식을 산성으로 옮기게 한다 재물
남쪽으로 내려간 적이 먹을 것을 못 구한다.
넷째 장 · 전개 — 1018년 12월, 흥화진
둑을 터뜨리자 물이 쏟아졌고 복병이 거란군을 쳤다. 그런데 소배압은 물러나지 않고 싸움을 피해 남쪽으로 내달리려 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힘(무력·조직),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척후를 풀어 소배압이 가는 길을 쫓는다 정보
소배압이 어느 길로 가는지 미리 안다. - 흥화진 기병을 쉬게 하지 않고 남쪽으로 돌린다 힘
달아나는 적을 놓치지 않고 바짝 뒤쫓는다. - 흥화진 승전을 북계 고을마다 알린다 이름
고을 장정들이 모여 길목을 지킨다.
다섯째 장 · 전개 — 1018년 12월 하순, 청천강 나루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려 한다. 강을 건너면 그 너머는 서경, 그리고 개경이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 붙잡은 거란 군사에게 군량 사정을 듣는다 정보
적이 굶주려 서두른다는 약점을 안다. - 나루의 사공과 어부들을 모아 배를 거둔다 사람
적이 강을 못 건너 남쪽 길이 막힌다. - 나루 마을에 곡식과 겨울옷을 풀어 붙든다 재물
마을 사람들이 적의 움직임을 알려 준다.
여섯째 장 · 그날 — 1019년 정월 초, 청천강 남쪽 기슭
거란군이 강을 건너려 한다. 여기서 돌려세우면 귀주 동쪽 들판의 그날이 한 달 먼저 온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김종현의 기병을 나루 앞에 세워 길을 막는다 힘
적이 개경 쪽으로 못 가고 귀주 승리가 한 달 빨라진다. - 굶주린 거란군에게 북쪽 길만 열어 둔다 정보
물러나는 적이 귀주에서 기다리던 본진에 걸린다. - 강민첨·조원과 남쪽 길목을 한꺼번에 닫는다 사람
갈 곳 잃은 적이 귀주로 몰려 정월 안에 끝난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1019년 정월, 소배압은 개경 백 리 앞 신은현까지 내려왔고 개경 밖 백성은 들판을 비우고 성으로 들어갔다. 귀주 동쪽 들판의 싸움은 2월 1일에야 벌어졌고,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이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상원수
- 전쟁 때 군대 전체를 이끄는 총사령관
- 친조
- 신하 나라의 왕이 직접 찾아가 예를 올림
- 청야
- 적이 쓰지 못하게 들판을 비우고 사람과 곡식을 성으로 옮김
- 병마판관
- 군사 일을 맡은 관리
- 육주
- 압록강 동쪽 여섯 고을
- 흥화진
- 압록강 가까운 고려의 성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1018년, 귀주 동쪽 들판.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