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강화 천도
1231년 · 고려 · 막기
강화 천도 — 섬으로 가는 조정
한눈에 보기
- 언제
- 1231년 · 고려 고종 18년
- 어디서
- 개경과 강화도
- 무슨 일
- 1231년, 몽골군이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듬해 고려의 실권자 최우는 몽골을 피해 조정을 바다 건너 강화도로 옮겼다(강화 천도).
- 무엇이 문제였나
- 섬으로 간 조정은 버텼지만, 육지 백성은 산성과 섬으로 숨으며 30년 가까이 몽골군에게 짓밟혔다. 개경으로 돌아온 것은 1270년이었다.
- 이야기 속 목표
-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 가더라도, 육지에 남은 백성이 버려지지 않게 만든다
배경: 몽골과의 어긋난 첫 만남
13세기 초 몽골은 칭기즈 칸 아래 빠르게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고려와 몽골이 처음 손을 맞잡은 것은 1219년 강동성 싸움 때였다. 거란 무리를 함께 치면서 두 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뒤 몽골은 지나치게 많은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의 불만은 쌓여 갔다.
이때 고려의 실권은 왕이 아니라 무신 최씨 집안이 쥐고 있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가 나랏일을 이끌었다. 1225년,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죽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몽골은 고려를 탓했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1231년 8월,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다
1231년 8월, 장수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왔다. 서북면병마사 박서와 장수 김경손은 귀주성에서 몽골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나 몽골군은 귀주를 지나쳐 남쪽으로 내려와 개경을 압박했다. 고려는 그해 12월 몽골과 강화를 맺었고, 몽골의 감독관인 다루가치 72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전개 — 섬으로 갈 것인가
강화를 맺은 그 무렵부터 최우는 도읍을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말을 탄 군대라 물에 약하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1232년 2월부터 천도가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오랜 도읍을 버리는 일에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았다.
결말 — 1232년 여름, 섬으로 간 조정과 남겨진 백성
1232년 6월, 최우는 나라의 높은 대신들인 재추를 모아 천도를 결정했다. 참지정사 유승단은 반대했고, 야별초의 지유 김세충은 개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다 끌려 나가 처형되었다. 7월 6일 고종이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옮겼다. 육지의 백성에게는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 몽골군을 피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몽골은 곧 두 번째로 쳐들어왔다. 이때 대구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탔다. 그러나 그해 12월 16일,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승려 김윤후가 쏜 화살에 장수 살리타가 죽었고, 몽골군은 물러갔다. 이후 몽골은 30년 가까이 여러 차례 고려를 쳤다. 강화도의 조정은 버텼지만, 그동안 육지의 백성은 산성과 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고려가 개경으로 돌아간 것은 1270년이었다.
주요 인물
- 최우
- 최씨 정권의 집권자. 반대를 누르고 강화 천도를 밀어붙였다.
- 고종
- 고려의 왕. 1232년 7월 6일 개경을 떠나 강화로 옮겼다.
- 유승단
- 참지정사. 천도에 반대했다.
- 김세충
- 야별초의 지휘관. 개경 방어를 주장하다 처형되었다.
- 박서와 김경손
- 귀주성에서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 낸 장수들.
- 김윤후
- 처인성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를 쓰러뜨린 승려. 뒤에 충주성을 지킬 때는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사람들을 북돋워 성을 지켜 냈다.
왜 하필 강화도였나
강화도는 개경에서 가깝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바다로 나가는 어귀에 있어, 육지에서 보면 손에 잡힐 듯한 거리다. 그러나 섬과 육지 사이의 좁은 물길은 물살이 빠르고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배를 다룰 줄 모르는 군대가 건너기는 어려웠다. 썰물 때 드러나는 넓은 갯벌도 상륙을 막는 벽이 되었다. 섬이 커서 조정과 군사, 따라온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머물 땅도 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바닷길이었다. 고려는 지방에서 거둔 세금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조운을 하고 있었는데, 강화는 남쪽 바다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이 닿기 좋은 자리였다. 육지가 몽골군에 짓밟혀도 바닷길이 살아 있으면 조정은 곡식을 받아 버틸 수 있었다. 조정은 섬에 궁궐과 관청을 짓고 성을 쌓아, 개경을 옮겨 놓은 듯한 도읍을 꾸렸다.
연표로 보는 섬의 시대
- 1219년
- 강동성 싸움. 고려와 몽골이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 1225년
-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죽는다.
- 1231년 8월
- 살리타의 몽골군이 쳐들어오고, 귀주성이 버틴다. 12월에 강화를 맺는다.
- 1232년 7월
- 고종이 개경을 떠나 강화로 옮긴다.
- 1232년 12월
- 처인성에서 살리타가 죽고, 몽골군이 물러난다.
- 1236~1251년
- 새 대장경을 새긴다. 지금의 팔만대장경이다.
- 1258년
-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가 제거된다.
- 1259년
-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기로 하고, 태자가 몽골로 간다.
- 1270년
- 개경으로 돌아간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가 항쟁을 시작한다.
사료와 기록
이 시기의 줄거리는 조선 초에 엮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대어 알 수 있다. 고종 세가에 침입과 강화, 천도의 날짜가 적혀 있고, 최우를 다룬 열전에는 천도를 결정하던 회의와 김세충의 죽음이 나온다. 다만 이 책들은 고려가 무너진 뒤 조선에서 엮은 것이라, 무신 정권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 시대 사람이 직접 남긴 글도 있다. 문인 이규보는 새 대장경을 새기며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를 비는 글을 지어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 나라가 대장경을 새긴 까닭이 단지 불경을 보존하려는 데만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이다.
더 알아 둘 점
강화 천도를 두고는 평가가 갈린다. 권력자가 자기 안전을 위해 백성을 버리고 섬으로 도망쳤다는 시각이 있고, 기병이 강한 몽골을 상대로 오래 버티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고려는 섬의 조정을 지키며 수십 년 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은 것은 육지의 백성이었다. 처인성의 김윤후와 처인부곡 사람들, 충주성의 노비와 천민들처럼, 몽골군을 실제로 막아 낸 이들 가운데에는 섬에 가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이때 불탄 초조대장경을 대신해 새로 새긴 것이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이다. 강화의 대장도감과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새겼다고 전하는 이 경판은 조선 초 무렵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전하고, 경판을 보관한 장경판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강화읍에는 섬의 궁궐이 있던 고려궁지가 남아 있고, 섬에서 세상을 떠난 고종의 무덤인 홍릉도 강화에 있다. 몽골에 맞선 고려의 긴 항쟁은 1270년 개경 환도와 그에 반발한 삼별초의 항쟁으로 이어진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김세충 휘하의 야별초 신참, 유승단 댁에서 글 심부름하는 서동, 개경 시전 쌀가게의 맏아들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고려 고종 18년, 개경과 강화도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던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죽었다.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몽골은 고려를 탓했다.
1231년 8월,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넌다. 귀주성에서는 장수 박서와 김경손이 버티지만 몽골군은 개경 가까이까지 내려온다.
이듬해 여름 고려의 실권을 쥔 무신 최우는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기로 하고, 개경을 지키자던 장수 김세충은 끌려 나간다. 육지에 남은 백성은 삼십 년 가까이 산성과 섬으로 숨어야 한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1231년 8월,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넌 뒤
서북면에서 급보가 잇따른다. 귀주성은 버틴다지만 몽골 기병은 성들을 비켜 남쪽으로 내려온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재물(물자), 사람(인맥)의 기반을 다진다.
- 귀주성에서 빠져나온 사람에게 몽골군의 공성법을 듣는다 정보
몽골군이 성을 무너뜨리는 법과 막는 법을 안다. - 시전 상인들에게 성안에 곡식을 모아 두자고 설득한다 재물
개경이 에워싸여도 버틸 식량이 생긴다. - 유승단 문하 선비들과 자주 어울린다 사람
천도를 반대하는 대신에게 내 말이 닿는다.
넷째 장 · 전개 — 1231년 12월, 몽골과 화친을 맺은 뒤
고려는 몽골과 화친을 맺고 다루가치(몽골이 보낸 감독관) 일흔두 명을 받아들였다. 최우의 집에서는 섬으로 옮기자는 말이 오가기 시작한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힘(무력·조직), 정보(지식),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 야별초 동료들과 성벽 방어 훈련을 한다 힘
몽골식 공격을 막아 낼 군사가 길러진다. - 개경 성곽의 약한 곳과 고칠 몫을 장부로 정리한다 정보
개경을 지키는 데 드는 일을 숫자로 보일 수 있다. - 피란민에게 죽을 쑤어 나누며 신망을 얻는다 이름
백성이 내 이름을 알고 내 말에 힘이 실린다.
다섯째 장 · 전개 — 1232년 2월, 천도 논의가 조정에 오른 뒤
재추(나라의 높은 대신들)가 모여 천도(도읍을 옮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개경 사람들은 집과 밭을 두고 섬으로 가야 하느냐며 웅성댄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재물(물자),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 유승단 문하와 함께 반대 상소에 이름을 모은다 사람
천도 회의에서 반대 목소리가 커진다. - 곡식 창고를 돌며 성안에 남은 곡식을 헤아린다 재물
개경이 일 년을 버틸 수 있다는 증거가 생긴다. - 김세충과 함께 성문마다 지킬 사람을 짠다 힘
개경을 지킬 실제 방어 계획이 생긴다.
여섯째 장 · 그날 — 1232년 6월, 최우의 집 천도 회의
최우가 재추를 모아 천도를 정하려 한다. 유승단이 반대하고, 개경을 지키자고 나선 야별초 지유 김세충이 끌려 나가려 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 유승단과 함께 섬과 육지를 함께 지키는 안을 올린다 사람
육지에도 군사와 식량이 남아 백성이 버려지지 않는다. - 곡식 장부로 개경이 일 년을 버틸 수 있음을 보인다 재물
천도가 미뤄지고 몽골과의 전쟁이 일찍 끝난다. - 몽골의 공성법과 성벽 보수안을 함께 내놓는다 정보
개경에 군대가 남아 육지가 몽골에 맞선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김세충은 처형되었고, 7월 6일 고종은 개경을 떠나 강화로 옮겼다. 육지의 백성은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 삼십 년 가까이 몽골의 침입을 견뎌야 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 최씨 정권
- 무신 최충헌과 그 자손이 고려의 실권을 쥔 시기
- 입보
- 백성이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적을 피하는 일
- 지유
- 야별초 같은 군대의 지휘관
- 초조대장경
- 고려가 처음 새긴 대장경판
- 야별초
- 최씨 정권이 부리던 날랜 군대
- 시전
- 나라가 허락한 큰 상점 거리
- 다루가치
- 몽골이 보낸 감독관
- 재추
- 나라의 높은 대신들
- 천도
- 도읍을 옮김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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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섬으로 가는 조정.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