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발해의 멸망

925년 · 고려 · 막기

발해의 멸망 — 해동성국의 보름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925년 · 발해 대인선 대
어디서
부여부와 홀한성
무슨 일
925년 12월, 거란의 왕 야율아보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쳤다. 서쪽 큰 성 부여부가 무너지자 도읍 홀한성도 곧 항복했다(발해 멸망).
무엇이 문제였나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라 불리던 발해가 큰 싸움도 없이 보름 남짓 만에 망했다. 고구려를 이은 나라가 사라지고 그 땅은 거란 차지가 되었다.
이야기 속 목표
거란이 갑자기 쳐들어와도 발해가 보름 만에 무너지지 않게 만든다

배경: 고구려를 이은 나라와 새로 일어선 거란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옛 땅에서 일으킨 나라로, 200년 넘게 이어졌다. 전성기에는 5경 15부 62주를 두고 넓은 땅을 다스렸고, 중국에서는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라는 뜻으로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당, 신라, 일본과 사신과 물건이 오갔고, 수도 상경 용천부는 당의 장안을 본떠 바둑판처럼 길을 낸 큰 도시였다. 그 마지막 왕이 15대 대인선이다.

10세기 초, 발해 서쪽에서는 거란이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웠고, 주변 세력을 차례로 꺾었다. 대인선은 후량, 신라, 일본 등과 외교를 넓혀 거란을 견제하려 했다. 『요사』에는 924년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거란은 이를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925년, 사람들이 먼저 떠나다

멸망 직전의 발해에서는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는 일이 잇따랐다. 『고려사』에 따르면 925년 장군 신덕이 500명을 이끌고 고려로 넘어갔고, 예부경 대화균과 균로, 사정 대원균 같은 관리들도 뒤를 이었다. 나라를 받치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떠났다는 것은 안에서 이미 마음이 흩어지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전개 — 925년 12월부터 926년 정월 초까지

서쪽 원정을 마친 야율아보기는 925년 12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발해로 향했다. 926년 정월 초, 거란군은 발해 서쪽을 지키던 요충지 부여부를 에워싸 함락했다. 함락된 날을 정월 3일로 보는 설이 있다. 거란은 쉬지 않고 수도 상경 용천부, 곧 홀한성으로 기병을 보냈다. 『요사』에 따르면 발해의 노상이 이끈 3만 군이 맞섰지만 이마저 깨졌다.

결말 — 926년 정월, 홀한성의 항복

거란군이 홀한성을 에워싸자 대인선은 항복할 뜻을 밝혔다. 이틀 뒤 그는 소복을 입고 신하 300여 명과 함께 성을 나와 항복 의식을 치렀다. 『요사』는 그날을 정월 14일로 적었다. 큰 싸움 없이, 거란이 움직인 지 보름 남짓 만에 수도가 항복한 것이다. 그 뒤로도 일부 지역에서 반란과 재항복이 이어졌지만, 거란은 발해 땅에 동단국을 세우고 황태자 야율배를 왕으로 삼았다. 대인선은 거란의 수도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연표로 보는 발해의 마지막

사료와 기록: 발해는 왜 이렇게 알기 어려운가

발해의 멸망을 정리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기록이다. 발해 스스로 남긴 역사서는 전하지 않는다. 멸망의 날짜와 과정은 대부분 거란의 역사를 적은 『요사』에 기대고 있고, 『요사』는 거란이 망한 뒤 원나라 때 엮였다. 이긴 쪽의 기록이니 발해 안의 사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온 일은 『고려사』에 남아 있다. 여기에 일본의 역사책과 발해 사신이 일본에 가져간 국서, 무덤과 성터에서 나온 유물이 더해져 발해의 모습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1784년 『발해고』를 쓰면서,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쓰지 않아 그 땅과 역사를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신라와 발해가 남과 북에 함께 있던 때를 남북국이라 불러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쓰는 남북국 시대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했다.

주요 인물

대인선
발해의 마지막 왕. 외교로 거란을 견제하려 했으나 926년 홀한성에서 항복했다.
야율아보기
거란의 태조. 916년 나라를 세우고 925년 직접 발해 원정에 나섰다. 돌아가던 926년 가을 세상을 떠났다.
야율배
야율아보기의 황태자. 발해 땅에 세운 동단국의 왕이 되었다.
신덕과 대화균
멸망 직전 고려로 망명한 발해의 장군과 관리.
대광현
발해 세자를 자칭한 인물. 934년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그 뒤에 일어난 일

거란은 발해를 무너뜨렸지만 그 땅을 곧바로 다 다스리지는 못했다. 발해를 무너뜨린 야율아보기는 그해 돌아가던 길에 숨을 거두었다. 동단국은 몇 해 지나지 않아 중심을 서쪽의 요양 방면으로 옮겼고, 발해 사람들 상당수도 그쪽으로 옮겨졌다. 옛 발해 땅 곳곳에서는 유민들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후발해, 정안국 같은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지만, 그 실체와 범위를 두고는 연구자마다 해석이 다르다.

많은 발해 사람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4년 망명해 온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내리고 왕실의 족보에 올려 주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942년에는 거란이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겨 죽이고 사신을 섬으로 보냈다. 거란이 발해와의 맹약을 저버리고 하루아침에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발해의 멸망은 이렇게 고려가 거란을 대하는 태도에도 오래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려가 북쪽 옛 땅에 관심을 두고 거란과 긴장 관계를 이어 간 데에는, 고구려와 발해를 잇는 나라라는 의식도 한몫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자주 헷갈리는 점

발해가 망한 해는 926년이다. 거란의 출병은 925년 12월이지만, 부여부 함락과 대인선의 항복은 이듬해 정월의 일이다. 다만 날짜에도 이견이 있고, 거란의 공격이 기록보다 일찍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때 백두산 화산 분화가 멸망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분화 시기가 940년대 무렵으로 밝혀지면서 힘을 잃었다.

발해가 어느 나라의 역사에 속하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이웃 나라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다만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다는 뜻을 밝히고 스스로 고려국왕이라 일컫기도 한 것은 기록으로 전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이었다는 점은 발해 스스로도 밝혔던 일이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부여부 망루에서 불 신호를 올리는 지기, 홀한성 궁중 문서를 맡은 하급 서리, 담비 가죽을 거래하는 상경의 상인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발해 대인선 대, 부여부와 홀한성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의 왕은 대인선이다. 서쪽에서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 왔다.

925년, 장군 신덕이 오백 명을 이끌고 고려로 넘어가고, 대신 대화균을 비롯한 관리들도 뒤를 이었다. 그해 12월, 아보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떠난다.

기록에 따르면 부여부(발해 서쪽을 지키던 큰 성)는 정월 초에 무너지고, 홀한성(발해의 도읍)의 왕은 큰 싸움 없이 성을 나와 항복한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925년 가을, 신덕이 고려로 떠난 뒤

장군 신덕이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갔다. 홀한성의 관리들은 다음은 누구냐며 서로 눈치를 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정보(지식), 재물(물자)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925년 12월, 거란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문

거란 왕 아보기가 아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서쪽 상인들에게서 흘러온다. 홀한성은 아직 이 소문을 모른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사람(인맥),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926년 정월 초, 부여부가 에워싸인 날

거란군이 부여부를 둘러쌌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들판이 거란 기병의 깃발로 뒤덮였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재물(물자), 힘(무력·조직),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926년 정월, 부여부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홀한성에 닿은 날

부여부가 무너졌다는 급보가 홀한성에 닿았다. 거란 기병이 동쪽으로 달려오는 가운데, 왕과 대신들은 맞설지, 버틸지, 떠날지를 오늘 정해야 한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부여부가 무너지고 홀한성은 포위되었다. 대인선은 소복을 입고 신하 삼백여 명과 함께 성을 나와 항복했고, 거란은 그 땅에 동단국을 두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해동성국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 중국에서 발해를 부르던 말
상경 용천부
발해의 수도. 홀한성이라고도 한다
동단국
거란이 발해 땅에 세운 나라
친정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감
유민
나라가 망한 뒤 남은 백성
부여부
발해 서쪽을 지키던 큰 성
홀한성
발해의 도읍
정당성
발해의 최고 관청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925년, 해동성국의 보름.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