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orn Into · 역사 속에서 환생하기 · 사건 해설 · 황산벌 전투와 백제의 멸망

660년 · 고조선·삼국·발해 · 막기

황산벌 전투와 백제의 멸망 — 황산벌과 사비의 열흘

글 atelier Daham · 작성 · 수정

한눈에 보기

언제
660년 · 백제 의자왕 20년
어디서
사비성과 탄현, 기벌포
무슨 일
660년, 당나라 군사 13만이 바다로, 신라 김유신의 군사 5만이 땅으로 함께 백제를 쳤다(황산벌 전투, 백제 멸망).
무엇이 문제였나
두 길목 탄현과 백강을 막자는 충신들의 말이 묻혔다. 계백은 황산벌에서 전사했고, 7백 년 가까이 이어진 백제가 열흘도 안 되어 항복했다.
이야기 속 목표
"탄현과 백강을 막으라"는 흥수의 말이 받아들여지게 해, 적이 백제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배경: 두 길목을 막으라는 말

7세기 중반의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다투던 때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았고, 백제는 그 사이에서 신라를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의자왕이 다스리던 백제 조정에서 좌평 성충은 바깥의 위협을 경고하다 옥에 갇혔다. 656년, 성충은 옥중에서 마지막 글을 올렸다. 적이 쳐들어오면 땅으로는 탄현(침현)을, 물길로는 기벌포를 넘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삼국사기』 의자왕 16년 조에 전하는 이야기다.

탄현은 신라 쪽에서 백제 땅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이고, 기벌포는 백강, 곧 지금의 금강 어귀에 있는 포구다. 두 길목만 막으면 도읍 사비까지 적이 쉽게 닿지 못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떻게 흘러갔나

발단 — 660년 6월, 나당 연합군의 출발

660년, 신라와 당은 함께 백제를 치기로 했다. 당의 장수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 13만이 산둥 반도의 내주에서 배를 띄웠고, 6월에 덕물도에서 신라군과 만났다. 신라에서는 김유신이 군사 5만을 이끌고 땅으로 내려왔다. 바다와 땅, 두 방향에서 동시에 오는 공격이었다.

전개 — 7월 초, 조정이 말로 시간을 보내다

사비 조정은 어느 쪽을 먼저 막을지 정하지 못했다. 좌평 의직은 바다를 건너와 지친 당군을 먼저 치자고 했고, 달솔 상영은 신라군을 먼저 막자고 했다. 의자왕은 귀양 가 있던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흥수의 대답은 성충과 같았다. 백강과 탄현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귀양 간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렇게 말이 오가는 사이 신라군은 탄현을 넘었고, 당군은 백강으로 들어왔다.

급해진 백제는 달솔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맡겼다. 계백은 황산벌, 지금의 충남 논산 연산 일대에 세 곳의 진영을 세우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결말 — 7월 9일부터 18일까지

7월 9일,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는 수가 열 배인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 신라군의 기세가 꺾이자 장군 흠춘과 품일이 각자 아들인 화랑 반굴과 관창을 내보냈고, 두 젊은이가 잇달아 전사했다. 이를 본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총공격에 나섰고, 결사대는 무너졌다. 계백은 전사했고 좌평 충상, 달솔 상영 등 20여 명이 사로잡혔다.

같은 날 당군은 기벌포에 상륙했다. 신라군이 약속한 날짜에 늦게 도착하자 소정방이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베려 했고, 김유신이 강하게 맞서는 일도 있었다. 7월 12일과 13일 무렵 나당 연합군이 사비를 에워싸자 의자왕은 웅진으로 몸을 피했고, 사비는 함락되었다. 7월 18일, 의자왕은 웅진에서 돌아와 항복했다. 7백 년 가까이 이어진 백제가 연합군이 움직인 지 열흘 남짓 만에 무너진 것이다.

주요 인물

의자왕
백제의 마지막 왕. 웅진으로 피했다가 7월 18일 항복했다.
계백
백제의 달솔. 결사대 5천으로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네 번 물리쳤으나 끝내 전사했다.
성충과 흥수
백제의 좌평. 둘 다 탄현과 백강(기벌포)을 막으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유신
신라군을 이끈 장군. 황산벌에서 계백과 맞섰다.
소정방
바다로 온 당군 13만의 장수. 기벌포에 상륙했다.
반굴과 관창
신라의 화랑. 황산벌에서 잇달아 전사했고, 그 죽음이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날짜로 보는 열흘

660년 6월
소정방의 당군이 덕물도에 닿아 신라의 태자 법민을 만나고, 7월 10일 사비 남쪽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7월 초
사비 조정이 어디를 먼저 막을지 다투는 사이, 신라군이 탄현을 넘는다.
7월 9일
황산벌 전투. 같은 날 당군이 기벌포에 오른다.
7월 12~13일
연합군이 사비를 에워싼다. 의자왕이 웅진으로 피하고, 사비가 무너진다.
7월 18일
의자왕이 웅진에서 나와 항복한다.
9월
소정방이 의자왕과 왕족, 신하들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간다.

이 싸움을 전하는 기록

황산벌과 사비의 열흘을 가장 자세히 적은 책은 고려 때 김부식 등이 엮은 『삼국사기』다.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흐름이 나오고, 계백, 김유신, 관창의 열전에 장면이 더해진다. 성충과 흥수의 말, 의직과 상영의 다툼, 반굴과 관창의 이야기도 모두 여기에 기댄다. 다만 『삼국사기』는 백제가 무너지고 거의 5백 년 뒤에 엮은 책이고, 백제 쪽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아 신라와 당의 눈으로 본 이야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해 둘 만하다.

당나라 쪽 기록도 있다.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가 이 전쟁을 적었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몸돌에는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고 새긴 글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이라는 숫자는 『삼국사기』에 적힌 것인데, 실제 규모가 이보다 작았을 것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그 뒤에 일어난 일

사비가 무너졌어도 백제 사람들이 모두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 장수 흑치상지 등이 곳곳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왜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데려와 왕으로 세웠다. 한때는 2백여 성이 호응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도부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 도침과 복신이 잇달아 목숨을 잃었고, 663년 백강 어귀에서 백제 부흥군과 왜의 지원군이 당과 신라의 수군에 크게 졌다. 이 싸움을 고비로 부흥 운동은 힘을 잃었다.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직접 다스리려 했다.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몇 해 뒤 고구려가 무너진 다음에는 당과 신라가 맞서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은 그해 낙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남은 곳

사비의 옛 터인 충남 부여에는 부소산성과 정림사지, 왕궁 터로 보는 관북리 유적이 있고, 웅진이었던 공주에는 공산성이 있다. 이 유적들은 익산의 유적과 함께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황산벌이었던 논산 연산 일대에는 계백을 기리는 유적과 그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 있다.

자주 헷갈리는 점

백제의 멸망은 흔히 ‘삼천궁녀’나 ‘낙화암’ 같은 이야기와 함께 떠올려지지만, 이런 장면은 후대에 덧붙여진 설화로 보는 시각이 많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오히려 조정의 판단이 늦었다는 점이다. 두 길목을 막으라는 조언은 두 번이나 나왔고, 결사대는 들판에서 뛰어난 싸움을 보였다. 그러나 막아야 할 곳을 정하지 못한 사이 적은 이미 고개와 강을 넘었다.

계백이 출정 전에 가족을 죽였다는 기록도 전하지만, 그 장면은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황산벌의 결사대와 어린 화랑들의 죽음은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와 노래로 남았다.

이야기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사건은 ‘막기’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깨어난다. 몸은 흥수의 귀양지에서 시중드는 하인, 계백 휘하에서 목책을 맡은 군관, 왕궁 문서를 나르는 젊은 사인 가운데 하나이고, 가끔은 내 몸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떨어진다. 유명한 인물 본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그 결말을 막거나 줄이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는 일곱 장이다. 첫 장에서 깨어나고, 둘째 장에서 위의 한눈에 보기 카드로 사건을 읽고 각오를 정한다. 셋째부터 다섯째 장까지 기반을 다지고, 여섯째 장 ‘그날’에서 사건을 튼다. 아래는 그 장면들과, 각 선택을 고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 문장은 직접 읽을 때를 위해 남겨 둔다.

둘째 장 · 그 시대 — 백제 의자왕 20년, 사비성과 탄현, 기벌포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발단을 따라 시작한다. 깨어난 나는 이 시대를 이렇게 읽는다.

656년 좌평(백제의 가장 높은 벼슬) 성충은 옥에 갇힌 채 마지막 글을 올렸다. 땅으로는 탄현(신라에서 넘어오는 고갯길)을, 물길로는 백강(지금의 금강) 어귀 기벌포를 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660년, 당의 소정방이 군사 십삼만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 김유신의 군사 오만이 땅으로 내려온다. 사비(백제의 도읍) 조정은 어디서 먼저 막을지를 두고 말만 오간다.

귀양 간 좌평 흥수의 대답은 성충과 같을 것이고, 그 말은 묻힌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셋째 장 · 발단 — 660년 6월, 당군이 덕물도에 닿았다는 소식

당의 배가 서해의 섬 덕물도에 닿아 신라군과 만났다는 소식이 사비에 들어왔다. 대신 의직은 당군을, 상영은 신라군을 먼저 치자며 하루 종일 다툰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재물(물자), 힘(무력·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넷째 장 · 전개 — 660년 6월 말, 흥수에게 사자가 간 날

대왕이 마침내 고마미지현의 흥수에게 사자를 보냈다. 흥수의 답은 성충과 같다. 백강과 탄현을 막으라는 것이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정보(지식), 재물(물자), 이름(평판·여론)의 기반을 다진다.

다섯째 장 · 전개 — 660년 7월 초, 사자가 사비로 돌아온 날

대신들은 흥수가 오래 갇혀 원망을 품었을 테니 그 말을 쓰지 말라고 아뢴다. 그 사이 신라군은 탄현으로, 당군은 백강으로 다가온다.

이 장면의 세 갈래는 각각 사람(인맥), 힘(무력·조직), 정보(지식)의 기반을 다진다.

여섯째 장 · 그날 — 660년 7월 초, 신라군이 탄현 아래에 닿은 날

조정은 여전히 다투고, 신라군은 탄현 고개 아래에, 당군은 백강 어귀에 닿았다. 남은 시간은 하루뿐이다.

그날의 선택은 역사를 트는 세 가지 방법이다. 앞의 장에서 그 방법에 맞는 기반을 다져 두었을수록 뜻대로 풀리기 쉽다.

이야기가 기준으로 삼는 실제 결말은 이렇다. 흥수의 말은 묻혔다. 계백은 결사대 오천으로 황산벌에서 네 번을 이겼으나 끝내 전사했고, 사비성은 포위되었다. 의자왕은 웅진으로 피했다가 7월 18일 항복했다. 내가 고른 길이 이 문장을 바꾸는지가 결말을 가른다.

일곱째 장 ‘귀환’에서는 돌아갈지 남을지 고른다. 돌아와서 현실이 바뀌어 있을 수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고 그 시대에 남을 수도 있다.

낯선 말 풀이

달솔
좌평 다음가는 백제의 높은 관등
결사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부대
기벌포
백강(금강) 어귀의 포구
웅진
지금의 공주. 사비 이전 백제의 도읍
화랑
신라의 젊은 인재 집단
좌평
백제의 가장 높은 벼슬
탄현
신라에서 넘어오는 고갯길
백강
지금의 금강
사비
백제의 도읍
목책
나무 말뚝 울타리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해설은 아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날짜와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본문에서 갈리는 대목은 따로 적었다.

이 사건으로 환생하기

660년, 황산벌과 사비의 열흘. 무료, 회원가입 없이 일곱 장.